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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서 삶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 영웅의 여정과 영성의 길
한승훈의 신화의 질문 5화
세계 신화의 수많은 디테일들과 다양한 역할은 그저 신비주의적인 원형 신화에 들러붙은 문화적 잡음으로 처리되어야 할까? 그럴 경우 우리는 신화를 통해 알 수 있는 뭔가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2021.07.30)
종교학자 한승훈의 '신화의 질문' 칼럼이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신화를 새롭게 읽으며, 인류의 흥미진진한 질문과 만나 보세요. |
1909년,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칼 구스타프 융은 미국으로 떠나는 배에 올랐다. 당시까지 두 사람은 정신분석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가능성을 믿는 동지였다. 그러나 약 3년 뒤, 그들은 서로의 좁힐 수 없는 차이를 확인하고 갈라서게 된다. 이 결별의 결정적인 원인은 정신분석학의 핵심적인 개념인 ‘무의식’에 대한 해석 차이에 있었다. 인간의 정신에서 의식이라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실제로 강력한 충동과 열정을 일으키는 것은 그 근저에 있는 무의식이라 생각했다는 데까지는 둘 모두가 동의했다. 그러나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의 충동이란 근본적으로 ‘성적’인 것이었다면, 융이 말하는 무의식은 인류 모두가 공유하는 ‘원형적’인 상징과 이미지의 바다였다.
융 스스로는 전문적인 학자가 아니었지만, 그의 ‘집단무의식’과 ‘원형’ 개념은 인문학의 여러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비교신화학에서 융의 관점은 나중에 구조주의라는 대안이 등장하고, 역사적 접근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양쪽 극단에서의 공격으로 박살이 나기까지 기본적인 전제 같은 것으로 남아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 살고 있든 인간의 정신은 서로 통한다는 융의 생각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인류 정신의 통일성”이라는 낭만적인 주제에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이로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융과 그의 영향을 받은 이들에게 신화는 너무나 매력적인 텍스트였다. 그것은 인간의 무의식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자료로 취급되었다. 정신분석학 일반에서 무의식 분석의 기본적인 자료는 환자의 꿈이다. 융은 치료 초기 단계의 환자의 꿈이 개인적인 콤플렉스를 보여주는 반면, 치료가 진행되는 과정의 환자는 꿈속에서 고전적인 신화들과 같은 이미지와 모티프를 체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꿈은 사적인 신화고, 신화는 공적인 꿈인 셈이다. 그는 세계 각지의 신화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요소들을 모으면 인류 전체의 정신을 이해하는 일도 가능하다고 믿었다.
조지프 캠벨은 융의 관점을 신화 연구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대표적인 학자다. 그가 가장 주목한 것은 영웅신화였다. 영웅신화의 구조가 전세계적으로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은 융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의 제자였다가 의견 차이로 결별한 오토 랑크가 『영웅의 탄생』(루비박스, 2016)에서 이미 주장한 바 있었다. 캠벨은 여기에 인류학의 통과의례 이론과 신화에 대한 융의 관점을 결합시켰다. 즉, 영웅은 개인의 의식을 넘어서 자아의 통합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의 모델이고, 영웅신화는 그런 영적인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지도 혹은 안내서라는 주장이다.
대표작인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민음사, 2018)에서 그는 모든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영웅의 행동이 하나의 체계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신화나 북유럽신화 속 전사 영웅들의 모험도, 그리스도교나 불교의 교조 이야기도 모두 똑같은 ‘단일신화(monomyth)’의 서로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특정한 계기로 일상적 삶에서 분리되어 모험을 떠나고, 시련을 겪으며 변모한 후, 원래의 세계로 돌아와 비범한 업적을 이루는 각본에 따라 행동한다. 이것은 신비주의적 수행자가 일상 의식에서 벗어나 무의식의 심층에서 괴물과 같은 마음의 그림자를 극복한 후 개체성을 넘어선 신비적인 직관에 이르는 과정과 일치한다.
캠벨의 단일신화 이론은 역사적, 문헌학적인 신화 연구를 하는 학자들에게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대중적으로는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조지 루카스가 캠벨의 책을 읽고 <스타워즈> 시리즈를 구상했다는 사실을 밝힌 이래로, 캠벨의 영웅신화 이론은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제작자들을 비롯한 대중문화 창작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캠벨의 방송 대담집인 『신화의 힘』(21세기북스, 2020)도 1980년대에 발간된 이래 판을 거듭하며 널리 읽히고 있다. 거기에 담긴 것은 영웅신화를 읽으며 우리의 삶을 영웅의 모험과 같은 영적인 여정으로 인식한다면 언어를 뛰어넘은 초월적인 인식에 이를 수 있고, 그를 통해 인류 문명의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우리가 교리적인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그런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 종교의 신화보다는 다른 문화의 신화들을 읽는 게 좋다. 어차피 모두 같은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캠벨의 관점은 20세기 후반 영성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문화콘텐츠 산업에서의 성공을 계기로 오늘날 가장 널리 읽히는 신화이론이 되었다. 그러나 그 많은 신화가 오직 한 가지 목적(영적인 각성과 통찰)을 위해 반복되어 이야기되어왔다는 주장을 대체 어디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세계 신화의 수많은 디테일들과 다양한 역할은 그저 신비주의적인 원형 신화에 들러붙은 문화적 잡음으로 처리되어야 할까? 그럴 경우 우리는 신화를 통해 알 수 있는 뭔가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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