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원의 Designers’ Desk] 기하학적인 패턴에서 출발한 촉각적인 감수성 – 이재민 디자이너
<월간 채널예스> 2021년 4월호
컴퓨터 앞에 앉은 그는 일러스트레이터를 열었다. 북디자이너나 타이포그래퍼라면 인디자인을 열었을 것이다. (2021.04.06)
타이포잔치 2021 총감독으로 선임된 이재민은 2016년부터 국제그래픽연합 AGI의 멤버로 활동하는 등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으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스튜디오 fnt의 창립자이자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주로 규모가 큰 브랜딩 프로젝트 작업을 하는 fnt와 다소 분리해서, 지금은 이재민 디자이너 개인으로도 운신한다. 북디자인은 후자의 영역에 속한다.
컴퓨터 앞에 앉은 이재민은 일러스트레이터를 열었다. 북디자이너나 타이포그래퍼라면 인디자인을 열었을 것이다. 북디자이너, 그래픽 디자이너, 타이포그래퍼 사이에는 교집합이 크고 서로 간의 경계가 흐릿하지만 구분은 있다. 모두 글자와 그래픽과 책을 다루지만, 그중 북디자이너는 책에 주력하고, 그래픽디자이너는 그래픽적이고 보는 영역, 타이포그래퍼는 텍스트적이고 읽는 영역에 방점을 둔다. 작업 환경을 보니, 그의 본령은 과연 ‘아름다운 책도 만드는 그래픽 디자이너’다.
그의 데스크탑은 잘 디자인된 가구로 정돈된 실내를 보는 듯했다. 아름다운 그래픽 작업은 아름다운 그래픽 환경에서 나오고 있었다. 색채 팔레트를 왼쪽에 둔 배치가 참신하다. 가로로 비율이 긴 모니터 환경에서 심리적인 안정을 위해 양쪽의 균형을 맞춘 것이라 한다. 작업창들은 네 개의 기둥을 이루고 있으며, 왼쪽부터 ‘색 – 타이포그래피와 레이아웃 – 효과 – 요소들의 관계’ 순의 영역으로 보인다. 그는 일러스트레이터와 포토샵과 인디자인을 6:3:1 정도로 쓴다고 하니, 전체 작업 중 긴 텍스트의 디자인은 10% 정도 다루는 셈이다.
이재민의 그래픽적 기법 중에는 두 가지 방식이 눈에 띈다. 하나는 규칙이 수학적으로 정연하면서도 유희적인 배치이고, 다른 하나는 기하학적인 패턴에서 출발해서 물리적이고 촉각적인 감성의 재질로 귀결하는 방식이다. 전자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서울레코드페어’ 포스터 연작이 있다. 레코드판들의 배열은 때로 수치로 환산하는 수열을 따른다. 단순한 산술 수열이 아니라 복잡한 재미가 깃든 기하 수열이다. 이재민은 이런 기법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다. 가메쿠라 유사쿠로 대표되는 국제주의적 양식으로 잘 알려진 기법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국제적 양식이라는 것은 지역적 특수성이 아닌 인간 보편에 소구한다는 뜻이다. 특정한 사람이 두드러진 행보를 보일 수는 있지만, 결국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끊임없이 지향하는 원형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발짝 더 나아간 곳에 그의 감수성이 가서 닿는다. ‘소금꽃이 핀다’ 포스터에서는 소금 결정처럼 반짝이는 작은 사각형들에 137.5도의 잎차례 배열을 응용했다. 『나는 있어 고양이』 표지 위 가장 큰 패턴은 10과 3의 관계처럼, 딱 떨어지지 않으면서 무아레로 겹쳐진다. 마치 재즈의 엇박같은 리듬감이다.
‘레안드로 에를리치: 그림자를 드리우고’ 포스터에서는 연기 같기도 한 물결 위에 ‘튜링 패턴’이 응용되어 있다. 복잡한 알고리즘을 거쳐서 나오는 패턴이다. 이런 복잡성과 임의성이 중첩되는 궁극에는 일러스트레이션이 있다.
‘연잎바람차’ 패키지의 오소리는 그가 마우스로 직접 그린 그림이다. 이상, 정연한 질서로부터 출발하면서 감성적인 복잡함으로 나아가는 일련의 이정이다.
이런 이정의 어느 스펙트럼 위에서, 대상에 대한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그의 언명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과하지 않으면서 물러나 있지도 않는다. 그는 그래픽 기법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적절히 구축하고는, 딱 그만큼의 디자인적인 의사 표현을 한다.
이번에는 데스크탑 위의 디지털과 컴퓨터로부터, 데스크 위의 물질 세계로 나와보자. 나는 그가 손에 익은 작업 도구들을 소개해주리라 기대했으나, 그는 장인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디자이너다운 합리적인 효율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사무실은 사물들로 가득했다. 사실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공간에는 대체로 많은 사물들이 웅성댄다. 물건에 대한 호기심은 물건을 잘 만들고 싶은 지향과 함께 간다. 그는 도구보다는 영감을 주는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사진을 통해 본 그의 개인 공간도 그랬다. 평생의 취향과 내공이 쌓아 올려진 듯한 재즈 음반들, 프라 모델, 미니카와 같은 수집품이 있고, 위스키가 있고, 두 마리의 고양이가 있다.
포스터나 브랜딩에 비해 작업량이 절제된 편인 그의 북디자인 도서 내역을 보니, 그가 좋아하는 작가와 재즈 음악, 그리고 고양이 책들이다. 그가 추천사를 써도 될 것 같은 책들, 그러니까 그는 말 대신 북디자인을 함으로써 그 책들에 그래픽 추천사를 바친 셈이다. 많은 말을 꺼리는 그의 의사는 책에서도 조용하지만 선명한 그래픽으로 드러나고 있다. 재즈 음악에 자신과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끼리,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끼리, 알아보며 슬쩍 웃음지을 수 있는 장치들을 책에 넣었다.
『Nobody Else But Me: A Portrait of Stan Getz』의 표지는 스탄 게츠의 유명한 음반을 자신의그래픽 기법으로 재해석해서 오마주했다.
『나는 있어 고양이』 속 여덟 챕터의 타이틀페이지에는 모두 다른 패턴을 썼다. 그리고 책 안에 털이 묻은 듯 보이도록 했다. 고양이의 외양을 묘사하는 대신, 묘주들이라면 바로 알아챌 고양이의 자국과 흔적들을 넣었다. 그렇게 그는 작가들 대열에 텍스트 아닌 그래픽으로 ‘나도 있어 고양이’라고 하면서 슬며시 동참한다.
『All Time Jazz 명반 가이드북』의 본문을 보면 상업 출판의 정도를 대체로 지키며 간다. 한글 폰트는 2019년에 한국출판인회의가 발표한 KoPub World 바탕체를, 로마자와 숫자는 헤라르트 윙어르가 디자인한 카피톨리움(capitolium)을 썼다. 양쪽 모두 알사탕처럼 단단하면서도 건조하지 않은 뉘앙스가 있다. 음반명과 수록곡이 영문으로 표기된 텍스트의 성격에 맞게, 한글과 서로 이질적이지 않도록 글자폭이 비교적 고르고 엑스하이트가 큰 로마자 폰트를 골랐다.
작년 11월, 그는 스튜디오 fnt의 16주년을 기념하며 미국의 버번 ‘메이커스 마크(Makers’ Mark)’로 자축하는 사진을 개인 계정에 올렸다. ‘창작자의 인장’. 모난 데 없이 달큰한 애수를 일으키는 버번이지만, 위스키라 만만치 않다. 정연하지만 단순하게 규정되지만은 않는 윤택한 그래픽을 내놓는 그의 디자인적 성격과도, 재즈 음악과도 닮아있는 위스키였다. 그런 맛과 향을 그는 책의 세계에도 몇 방울 떨구어 번지게 하고 있었다.
추천기사
관련태그: 예스24, 채널예스, 유지원칼럼, Designers Desk, 디자이너책상, 월간 채널예스, 이재민 디자이너
글문화연구소 소장, 디자이너, 타이포그래피 연구자, 작가. 『글자 풍경』, 『뉴턴의 아틀리에』를 썼다.
13,500원(10% + 5%)
19,800원(10% + 5%)
16,200원(10% + 5%)
19,800원(10%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