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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의 가끔은 좋은 일도 있다] 이거 사랑 아닌가
<월간 채널예스> 2021년 4월호
시작은 한 애니메이션이었다. 시골의 여고생이 겨울이 되면 작은 텐트를 챙겨서 스쿠터를 타고 아무도 없는 캠핑장에 혼자 가서 책을 읽고 코코아를 마시다 오는 내용의 작품이 있다고 했다. (2021.04.06)
세상에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 시간도 돈도 모자라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도 장소도 일도 옷도 음식도 사진도 영화도 책도 게임도 여행도 심지어 커피에 홍차까지. 음악은 말할 것도 없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살았다. 세상은 산해진미가 가득한 뷔페였고 나의 위장은 몹시 크고 튼튼했다. 나도 과거형으로 말하고 싶지 않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나이 탓이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기 때문이다. 다들 이렇게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나의 현재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이제 뷔페 식당 구석, 사람이 제일 없는 자리에서 위의 용량을 계산하며 정말 좋아하는 것만 조금씩 접시에 담아와서 먹는 사람이 되었다. 실제로도 그렇고 비유로도 그렇다. 여기 스테이크, 먹어봤지. 그래, 맛있어. 알아. 하지만 저건 구운지 좀 된 고기니까 차라리 육회를 조금 먹겠어. 그래, 저 칠리 새우도 유명해. 알아. 근데 안 땡기는 걸, 차라리 얼마 전엔 그런 욕구에 충실하다가 호텔 뷔페에서 열무 김치와 명란젓을 먹고 있는 자신을 보고 문득 생각했다. 아, 인제 뷔페 안 와야겠다.
돈과 시간과 체력은 한정적이다. 잘 지은 쌀밥에 김, 명란과 열무김치가 내 취향임을 알게 된 이상 본전을 위해 당기지도 않는 스테이크를 먹을 필요는 없다. 진짜 맛있는 명란과 열무를 찾는 여정만으로도 충분히 에너지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내면 편안하고 만족스럽다. 하지만 아쉬울 때가 있다. 그건 여행지에서 모르는 골목을 걷다가 코너를 돌 때 갑자기 만나게 되는 놀라움 같은, 그런 종류의 행복과 멀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작은 확률을 위해 모르는 골목을 계속 빙글빙글 돌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작은 한 애니메이션이었다. 시골의 여고생이 겨울이 되면 작은 텐트를 챙겨서 스쿠터를 타고 아무도 없는 캠핑장에 혼자 가서 책을 읽고 코코아를 마시다 오는 내용의 작품이 있다고 했다. 뭐야 너무 좋잖아. 그렇게 가볍게 틀어본 애니메이션이 끝이 날 무렵 내 머리는 캠핑으로 가득 찼다. 그것도 겨울 캠핑. 나도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에 걸린 별을 보며 코코아를 마시고 싶다. 야외에서 음식을 먹으면 무조건 2배로 맛있어진다는 가설을 실험해보고 싶다. 오랜만에 느끼는 강렬한 충동이었다.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면 이미 그 세계를 즐기고 있던 사람들이 구축해 둔 방대한 정보에 머리가 빙글빙글 돈다. 게다가 캠핑은, 특히나 겨울에 떠나는 캠핑은 갖춰야 할 것이 많았다. 영하 10도에 바깥에서 자도 얼어 죽지 않으려면 제대로 된 침낭, 핫팩, 물주머니, 등유 난로, 심지어 차가 흔들려서 통이 엎어져도 등유가 새지 않는 특수한 기름통까지 사야 했다. 국민템과 감성템은 또 얼마나 많은지… 캠핑은 내 에너지와 통장 잔고를 쏙 가져갔고 나는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며 엄청나게 즐거웠다.
그리고 떠나기 전,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기대하고 준비했는데 안 즐거우면 어쩌지. 야외에서 뭘 하는 걸 좋아해 본 적이 없다. 방에서 방으로, 도시에서 도시로 옮겨 다니는 여행이 좋았다. 그런 내가 과연? 나는 머릿속으로 짧은 글을 하나 적고는 어디에 올려야 가장 효과적일지를 고민했다. “한 번 사용한 캠핑용품 팝니다. 전부 사면 깎아드려요.”
그리고 나는 이번 겨울, 세 번의 캠핑을 했다. 별 하늘 아래 마시는 코코아는 최고였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마시는 옥수수 스프는 처음 느껴보는 감동이었다. 고작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었을 뿐인데. 하루 종일 맨땅에서 심심할까 걱정했는데 불만 보고 있어도 시간이 잘도 갔다. 핸드폰도 거의 보지 않았다. 뭐지? 이 감각. 동거인은 너무 힘이 들어서 입술이 다 터졌다. 나도 돌아와서 한참을 앓아 누웠다. 하지만 묘하게 기운이 뻗쳐서 욕조를 싹싹 닦고 소금을 듬뿍 풀어 목욕을 했다. 뜨거운 물에 잠겨 생각했다. 잘 모르겠는데 자꾸 생각나고 더 알고 싶은 거. 이거 사랑 아닌가.
나는 이제 새로운 동네에 가게 되면 근처에 캠핑용품점이 있는지부터 검색한다. 큰 가게는 물건이 많아서 재미있고 작은 가게는 스태프들의 취향이 드러나서 재미있다. 맛있는 식당을 알게 되면 포장이 되는지, 캠핑장에서 먹으면 어떨지를 생각한다. 싸고 좋은 장비에 감격하고 비싸고 좋은 장비에 감탄한다. 경치가 좋아서 피케팅을 한다는 캠핑장들을 동경하게 되었다. (실제로 티켓 오픈처럼 예고된 시간에 자리가 풀리고 금방 매진이 된다!) ‘다들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있구나’ 요즘 자주 하는 말이다. 다들 안 좋아하는 것만 찾아다녔는데. 그 시간도 너무 좋았고 계속 찾겠지만 조금 더 알고 싶어진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부모님들이 여행을 갈 때 왜 등산복을 입는가, 같은 것. 분명히 내가 아직 모르는 크고 확실한 이유가 있겠지. 나는 오랜만에 사랑에 빠졌다. “캠핑용품 팝니다”라는 글을 쓰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전에 바닷가 캠핑이랑 산꼭대기 캠핑은 꼭 해보고 싶다. 왜 하는지 모른 채 가능한 한 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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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음악가. 책 <익숙한 새벽 세시>, 앨범 <3> 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