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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도착한 노래

쥐빌레 바이어 'Colour Gr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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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도착한 노래는 누군가의 문을 연다. 마치 그것을 열기 위해, 기다려왔던 것처럼. (2021.02.05)


“종종 열쇠가 자물쇠보다 먼저 도착하기도 한다. 종종 이야기가 당신의 무릎 앞에 떨어진다.”(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15쪽)

모든 것이 내가 필요할 때, 퀵서비스처럼 도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소중한 것일수록 시차를 두고 온다. 받아들 때는 모르다가, 몇번의 계절이 바뀐 후에 깨닫는다. 아, 이 순간을 느끼기 위해, 이야기가 미리 도착한 것이었구나. 

내게는 예전의 음악을 듣는 일이 이야기를 모아두는 것과 같다. 작년 추석 때는, 외할머니댁에 가서 LP판을 대량 발굴했다. LP플레이어를 사고 주말마다 음반가게를 기웃거릴 무렵,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는 대학 다닐 때, LP판 안 모았어?” “예전에는 많이 모았던 거 같다. 그거 할머니댁에 아직 쌓여 있을걸?” 창고방을 뒤지자, 정말 먼지투성이 LP판들이 쌓여 있었다. 산울림, 김현식, 동물원 등 당시 유행하던 음반들. 외삼촌과 엄마는 대학 시절 이런 음악을 들었구나. 거리에서 이런 음악들이 들렸을 그 시대의 공기가 궁금해졌다. 

그렇게 골방에 묻혀 있다가, 우리 무릎 앞에 떨어진 음악. 쥐빌레 바이어의 앨범 <Colour Green>이 그렇다. 21세기 우리에게 전해진, 1970년대의 목소리. 쥐빌레 바이어는 독일인이자 무명 배우였는데 (빔 밴더스 감독의 영화에도 단역으로 출연했다) 30년이 흐른 후, 아들이 어머니가 취미 삼아 만든 녹음테이프를 발견하고, 이 음악은 알려진다. 먼지를 털고 세상 밖으로.



영어가 모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쥐빌레 바이어의 가사는 심플하다. 전하는 메시지는 수수하지만, 깊은 감정이 자리하는 것 같다. “너는 나의 과거와 고통을 잊게 해. 갑자기 내리는 부드러운 여름비처럼.”이라는 가사가 마음에 남는 ‘Forget About’은 힘에 부칠 때 듣곤 하는, 사랑하는 노래다. 아직도 면접을 보러 가는 길, 거리를 채우는 환한 햇빛을 느끼며 이 노래를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두렵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어떤 말도 필요 없이, 존재만으로도 자랑스럽게 했던” (‘Forget About’) 사랑은 바래고, 끝이 온다. 'The End'에는 사랑의 끝에서 느끼는 쓰라림이 담겨 있다. “왜 너를 안을 수 없을까? 네게 인생은 짧지만, 사랑은 오래간다고 말해주곤 했었는데”

최근에 쥐빌레 바이어의 음반을 사서, 앨범을 순서대로 듣고 있는데, 문득 ‘The End’가 먼저 오고 ‘Forget About’이 나온다는 걸 새삼 알아차렸다. 누구의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의 끝이 나온 후, 사랑에 대한 고요한 기쁨이 뒤따라 나오며 그것을 감싸는 것이다. 겨울 지나 봄이 오고, 따뜻한 가을볕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집열쇠처럼 들고 다니며 늘 듣던 음악이지만, 이제야 열쇠를 집어 들어 자물쇠를 연다. 

1970년에 기록된 어머니의 다채로운 감정을 듣게 된, 아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외할머니댁에서 엄마와 삼촌이 젊은 시절 수집한 LP들을 발견했던 내 기분과 조금은 비슷할까. 내가 모르던 시간을 거쳐온 마음을 상상해보는 일은 언제나 애틋하다. 먼지를 털고 검은 판 위에 바늘을 올려놓거나, 다락방의 테이프를 세상에 내놓는 일 같은 것.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노래는 누군가의 문을 연다. 마치 그것을 열기 위해, 기다려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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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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