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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여름, 글이 되는 노래] 삶이라는 책
<월간 채널예스> 2021년 2월호
절망적인 질문을 직시하고 울고 버텨내는 과정조차 결국 새로운 책으로 빚는 모습을 본다. (2021.02.02)
붕어빵의 계절이 한창이다. 머리쪽부터 먹는가, 아니면 꼬리 부분부터 입으로 가져가는가? 웹에서 새 음반을 발견한다. 첫 곡부터 듣는가, 혹은 ‘타이틀’ 표시가 붙은 트랙을 먼저 클릭하는가? 모르는 저자의 책을 집는다. 뒤표지를 먼저 살피는가, 앞날개부터 펼치는가, 아니면 목차를 찾아 훑는가?
위의 질문들을 거창하게 부풀려 본다. 그러니까 입, 귀, 눈을 통해서 타인이 만든 어떤 세계로 진입하는 방식, 혹은 반대로 그 세계의 침공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관한 얘기라 말해 본다. 『어린 왕자』 속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혹은 보아뱀으로 들어간 코끼리 이미지 같은 것을 떠올려 본다. 이 두근대는 상호 진입의 순간을 두근거리게 표현한 문장들을, 얼마 전 서점에서 마주한 시집 뒤표지에서 발견했었다.
책머리에 당신이 있다. 말머리에도 당신이 있고 나는 꼬리표를 뗐다. 얼마나 기다려야 도착하는가. 말 한마디의 이동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바꾸는 일일 텐데, 얼마나 움직여야 당신이 도착하는가. (후략) - 김언 시집 『한 문장』 뒤표지글 중에서
“꼬리표를 떼”고 알몸으로 진입하는 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바꾸는 일”로서의 읽기와 읽히기를 생각하니 비장해진다. 떼지 않으면, 온몸의 끝부터 끝까지를 다 허락하지 않으면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출발하지조차 않은 것이니까. 잘해 봐야 겉이나 핥고 미끄러질 뿐이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일단 겉에라도 닿아야 속으로 출발할 수 있다. 그렇게 겉으로 닿아온 이를 바라보는 하나의 마음이 아래의 노래에 적혀 있다.
모든 페이지를 다 펼쳐서
감춰 놓았던 상자를 열어서
여섯 살 동생이 태어나던 때와
열두 살 분노를 처음 배운 때와
열다섯 남겨졌다는 두려움과
그리고 열여덟 가슴 벅찼던 꿈
넌 무슨 얘길 할까
- 핫펠트 <나란 책> 중에서 (앨범 《MEiNE》, 아메바컬쳐, 2017)
“나”의 겉, 그러니까 지금의 모습 앞으로 다가온 “너”를 향해 “모든 페이지를 다 펼쳐”보이게 된다면, 그렇게 열린 “나란 책” 안으로 네가 들어온다면, 지금을 만들어낸 과거의 여러 모습을 장면장면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여섯, 열둘, 열다섯, 열여덟 – 가사의 행들이 페이지처럼 넘겨지고 너는 내게로 깊어지려 한다. 그 모습을 그리다가, 묻는다. 읽고 나서, 너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읽기 전의 너와는 어떻게 달라질까? 덮은 책을 너는 네 삶의 어디에 또 어떻게 두려고 할까?
책과 삶의 비유로 빚어진 또 다른 노래 속에서, “너”는 삶의 안 혹은 살의 곁에다 오래 둔 책으로 그려진다. (본디 반려견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어떤 인연으로 주위를 데우고 데워 온 “너라는 책 한 권”을 화자는 때로 한없이 펼쳐본다.
읽을 수 없는
하지만, 펼쳐도 펼쳐도
한없이 펼쳐지는
치자 꽃잎 같은
너라는 책 한 권
켜켜이 쌓인 너의 페이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향기로
날 안아줄 거야
읽을 수 없어도 괜찮아
함께 있잖아
- 루시드폴 <읽을 수 없는 책> 중에서 (앨범 《너와 나》, 안테나, 2019)
오랜 시간 가까이 두고 보아도, 펼치고 또 펼쳐도 다 알 길 없는 옆의 속. “읽을 수 없”다는 마음은, 읽음을 그치겠다거나 기어코 읽어내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읽을 수 없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가닿는다. 쌓여가는 네가 내는 향은 고스란히 짙어, 오래된 서가의 냄새처럼 나의 세계를 나날이 감싼다. “너의 페이지”에도 “나”와의 시간, 다시 말해 읽을 수 없으며 또한 읽을 수 없어도 괜찮을 나라는 제목의 책냄새로 감싸인 시간이 적힐 터이다. 그렇게 둘은 완연한 타자로서, 완연히 서로의 안에 포개어진다. 포개어지며 함께 쌓인다.
그러니까 우리가 각기 하나의 책이라고 할 때, 우리 삶은 각자의 현재로 불어오는 풍경들 및 타인이라는 책들과 서로 침투하고, 감상하고, 부대끼고, 껴안으며 끊임없이 연재되고 또 개고되는 일들의 연속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위태로운 연재자이자 동시에 편집자가 되는 셈이고 말이다. 순탄할 리 없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도무지 아무것도 못 쓰게 된 스웨덴의 노작가가 자신의 에세이를 통해, “나의 하루하루를 텍스트 주위에 엮는 것이 여전히 가능할까?”(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 『다시 쓸 수 있을까』, 13쪽)라는 절망적인 질문을 직시하고 울고 버텨내는 과정조차 결국 새로운 책으로 빚는 모습을 본다. 조바심이 날 때마다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때 무슨 일이든 생길 수도 있다”(19쪽)는 노작가의 말을 새기도록 한다. 오늘이 넘어간다. 새 페이지가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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