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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김현영의 여자들의 사회] 이름을 기억할 것, 사랑할 것, 그리고 낙관할 것- 『소녀 연예인 이보나』
<권김현영의 여자들의 사회> 7회
‘낙관’하자.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계보를 이어가자. 오늘의 사랑을 내일로 이어가기를. (2020.12.11)
“많은 여인들이 죽어갔으나 기록에 남지 못했다. 그들은 이름이 없었기에, 훗날 조선 시대의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률을 조사했을 때 여성의 비율은 매우 낮았다. 조선은 여성이 살기에 참 좋았나 보구나. 처음 조선의 사망률을 조사하던 이들은 그런 말을 할 뻔했다 한다. 여성의 죽음은 기록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없는 것처럼 보였을 뿐인데. 천연두가 물러갔을 때 조선의 왕은 식모와 하녀와 기녀와 산파들이 귀신이 되어 돌아올까 봐 겁이 났단다. 여귀들이 건강한 사내의 간을 뽑아먹는다는 소문이 사대문 안에 파다했으니까.” (한정현, 「우리의 소원은 과학소년」, 『소녀 연예인 이보나』, 이후 같은 책의 단편 이름만 표기)
이름 없는 사람들의 역사는 기록이 없어서 남기기 어렵다.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은 더욱 이름을 남기기 어렵다. 가부장제의 규범 안에서 살아야 했기에 이름이 남지 않았거나 규범을 어겼다고 천하게 취급되어 아예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몇 명의 목소리를 남기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이들이 어떻게 살을 맞대고 숨을 나누며 지냈는지, 어떻게 연결되고 무리 지어 살아갔는지는 더욱 알기가 어렵다. 일상사와 문화사가 약자의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이기도 한 이유다. 소설이라면 조금 더 자유로울 터이다. 우리 문학사에는 박경리의 『토지』라는 여성 서사의 전범(典範)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혈연으로 이어진 서사는 그것이 아무리 모계의 역사라고 해도 가부장적 가족제도라는 자장의 범위 안에 있게 마련이다. 그 가족 바깥에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사랑채나 다락 같은 곳에서 사실상 갇히고 잊힌 이들,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영영 떠났거나 저 멀리 바다 건너갔다는 소식만 전해오는 이들, 추방되거나 감금된 이들은 어떻게 기록되고 기억될 수 있을까.
이름 없는 여자들은 어떻게 계보를 가질 수 있을까. 이름 없는 여성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건 최초 혹은 뛰어난 여성들의 위인전을 쓰는 일이 아니다. 그런 방식의 서술은 결국 경기장의 룰을 바꾸지 않은 채 압도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몇몇 여성들에게만 조명을 비춘다. 방법론 자체가 달라져야만 이질적이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이들이 드러날 수 있고 그 속에서 위대함도 다시 정의되고 아름다움을 감각하는 방식도 다르게 찾아낼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점수판을 들고 있는 남자들 앞에서 선택받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상황을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버지니아 울프는 1928년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여성은 여성에게 가혹합니다. 여성은 여성을 싫어하지요. 여성은....그런데 여러분은 이 단어가 지긋지긋하지 않나요? 단언컨대 나는 그렇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여성이 좋을 때도 많습니다. 나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그들의 자유로움이 좋습니다. 나는 여성의 완벽함이 좋고 그들의 익명성이 좋습니다.” 여성에 대해 쓴다는 것은 ‘어떤’ 여성의 ‘어떤’ 부분에 대해 쓰고자 하는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다. 익명의 여성인가, 이름이 이미 있는 여성인가. 관습과 규범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인가.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도 걸작을 쓸 수 있을까요? 라는 불쾌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걸작은 여러 해에 걸쳐 수많은 이들이 함께 생각한 결과이고, 그 때문에 하나의 목소리 이면에 집단의 경험이 존재한다고.
『소녀 연예인 이보나』에는 8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이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시대적 배경도 등장인물의 시점도 다르지만 같은 세계관 안에 있다. 그 세계관의 뼈대가 되는 작품이 표제작인 ‘소녀 연예인 이보나’다.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1920년대를 공부했다고 한다. 혈연 가족에 대한 생애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혈연을 유전적 연결로 인식하지 않고 당대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사에 초점을 맞추고 인간관계가 겹치고 공간을 같이 점유하면서 생기는 관계 중 하나로 보는 점이 특별하다. 작가는 이름 없는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부르고, 당연의 세계에서 물의를 일으켜온 인물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들이 처해있는 역사적이고 사회문화적인 배경을 글 속의 맥락으로 끌어와 익명의 여성과 비남성들을 비혈연적인 방식으로 계보화한다.
권번을 졸업하고 유학을 떠났다가 무당이 되어 돌아온 1대 만신 유순옥, 생물학적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여자 옷을 끝까지 벗지 않고 죽임을 당한 2대 만신 희, 게이오 대학유학 중에 다시 경성으로 돌아와 여성 국극배우를 하던 주희, 어느날 주희의 형제인 주혁의 아이라며 맡겨진 트랜스젠더 여성 제인. 1대 만신 유순옥으로 시작해 4대 제인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아마도 구전으로 전해지는 공식적인 가족사에서는 지워졌을 인물들이다. 하지만 대가 끊긴 이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거미줄 같은 족보를 만들어낸다. 이들을 연결해주는 건 다름 아닌 이름이다. 이름을 지어주거나 스스로 이름을 지어부르는 이들. 이름을 물고 태어나지 못했거나 잘못된 이름으로 불렸던 이들이다. 주희는 배에서 만난 밀항 동무 해녀 이씨에게 곰브로비치의 희곡 주인공인 ‘이보나’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이씨는 태어나서 한번도 이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소녀 연예인 이보나」) 남편에게 학대를 당하던 안나의 어머니는 열한살에 남편의 등에 칼을 꽂고 남편에게 함께 괴롭힘을 당하던 수동무들을 풀어주고 본인도 탈출한다. 경성으로 흘러들어가 주점의 천기로 생계를 이어가던 안나의 어머니는 죽으면서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한다. 아이는 자라 스스로 이름을 안나라고 짓는다. (「우리의 소원은 과학소년」) 왜 이름이 이렇게 중요하냐면, 이름이 있어야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 아들과 혼인할 거라면 국적은요? 라고 묻는 어머니에게 남자는 “얘는 자기 글을 쓰는 사람” 이라고 질문을 막는데, 그때 그의 어머니는“ 이름을 가졌군요. 멋있어요” 라고 깊게 고개를 끄덕인다. (「과학하는 마음」) 이름이 없는 자들, 이름의 의미를 아는 자들은 이름 없음의 의미를 깊이 안다. 그리고 그 감각으로 이렇게 연결감을 이어나간다.
1대 만신 유순옥의 뒤를 이은 희가 유순옥의 가장 아끼던 옷을 입고 작두 위에 올라갔을 때 유순옥은 “저 옷은 쟤가 나보다 낫다”고 한 마디 한 게 전부였다.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 태어난 희의 결정에 유순옥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유순옥이 한창 활약하던 1920년대는 여자배우의 남장도 남자배우의 여장도 흔한 일이었고, 동성간의 애달픈 사랑이야기는 세간의 도저한 화제였다. 지금 알고 있던 것을 이전에도 알았더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전에는 알았던 것을 지금에는 모르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가 아직 결정되기 전, 규범이 아직 규범이 되지 못하고 권력과 통제에 대한 선연한 욕망으로만 드러났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주희가 해녀 이씨에게 지어준 이름 ‘이보나’는 규범을 깬다기보단 규범을 전혀 욕망하지 않으므로써 규범 자체의 욕망이 무엇에 대한 욕망이었는지 그 실체를 드러내는 인물이다. 곰브로비치의 희곡에서 필리프 왕자는 왕실에 반항하기 위해 거리에서 웃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이보나를 데려와 약혼한다. 그런데 왕도 왕비도 그리고 왕자까지도 모두 자신의 가학성과 권력욕 그리고 상대를 멸시하는 속된 마음을 들키게 하는 이보나를 견딜 수 없어 한다.“난 정상이야. 하지만 누군가 다른 사람이 비정상일 때는 나도 정상일 수 없어” (비톨트 곰브로비치,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결혼식/오페레타』) 필리프 왕자의 이 말은 비정상이라고 낙인찍는 자들의 욕망하는 것이 자신의 정상성에 대한 불안이라는 점을 정확히 드러낸다.
이 소설집에는 과학이라는 이름이 제목으로도 여러 번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식민지 시절 일본은 과학을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도구이자, 서구의 문명을 빠르게 이식해올 수 있는 전능의 학문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제중원 간호원으로 일하는 안나는 과학을 내세우는 이들을 미심쩍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성에서의 과학수사라는 건 한 명의 용의자를 잡기 위해 남장 여자. 여장 남자, 노동자. 여공 같은 이들에게 부랑자라는 딱지를 붙여 수십 명씩 가두는 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정작 강간살인범에게는 징역 6개월을 내리면서 말이다. 또한 성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딱지붙이듯 쓰여지는 변태성욕이라는 말은 아내의 몸에 칼로 문신을 새기고 머리채를 잡아 기찻길로 미는 남성들에게나 붙여져야 마땅할 터인데도 사회에 무해하고 서로에게 다정한 안나와 경준과 수성과 같은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달라붙어버렸다. ( 「우리의 소원은 과학소년」)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페미니스트와 퀴어들을 향한 증오가 범죄자에 대한 분노보다 더 일상적으로 가시화된다. “남자들은 왜 서로를 자꾸 씨발년이라고 하는 걸까?” “그러니까, 씨발놈도 아니고, 씨발놈들이 아주,”(「오늘의 일기예보」) 얼마 전 낙태죄 폐지 관련된 기사에 이런 댓글이 달린 것을 봤다. “페미들 비혼하고 낙태해서 대끊기게 해주세요. 씨를 말려야 해요” 그 댓글의 아래는 “퀴어들도요”라는 대댓글이 이어달렸다. 대가 끊기는 것이 가장 큰 저주라고 생각했을 이 댓글러는 페미니스트와 퀴어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증식되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페미니스트와 퀴어는 실패로 점철된 수많은 싸움을 통해 만들어지며, 부적응자의 감각 속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역사를 기록하고 공유하고 문화를 함께 향유하면서 연결되어있다는 감각을 가진다. 혈연가족이 주는 안정감이 오히려 더 큰 압력과 부담이었던 이들끼리 예측불가능한 도형의 유사친족을 만들어가면서 말이다.
여기 나오는 사랑 이야기들은 이가 빠지고 짝이 맞지 않게 모두 조금씩 어긋나있는데, 그 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 그것만이 중요하다. 빛의 레뷰(revue) 무대를 내려오는 다카라즈카 소녀 연예인들에게 사랑의 말을 건네는 어둠 속 소녀들의 숨길 수 없는 사랑처럼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타협없는 사랑 이야기. 타협만 하지 않는다면 자격 없는 여자들과 이름 없는 여자들이 만든 이 공유지는 대가 끊길 일도 씨가 마를 일도 없다. 그러므로, (안나의 스승이 해준 말대로, 안나의 입버릇대로) ‘낙관’하자.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계보를 이어가자. 오늘의 사랑을 내일로 이어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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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 연구자. 언제나 여자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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