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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윤이 칼럼] 핑크 속으로 풍덩

<월간 채널예스> 202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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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 아주 이쁜 핑크를 쓰자. 톡 튀면서 채도가 적절히 높은 핑크를 전면에 깔고, 타이틀 Pink Book을 깔끔하게 배치한 뒤 부제와 로고를 넣었다. (2020.11.09)



핑크 속으로 풍덩

핑크는 언제나 호불호가 있다. 내 주위에는 핑크 울렁증이 있는 사람도 있고, 핑크와 같은 팝한 컬러들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좋아하는 컬러가 무엇이냐 물었을 때 핑크가 빠지지는 않는다. 좋고 싫음 보다는 꼭 있어야 하는 컬러라고 해야 할까? 컬러 조합을 하다보면 핑크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참 다양한 톤으로 잘 섞여 있다. 어딘가에서는 독보적으로 튀고 또 어딘가에서는 작지만 차분하게 포인트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컬러다. 핑크 느낌도 채도가 낮은 것부터 네온까지 너무나 다양해서 늘 별색칩을 펼치면 몇 번을 빛에 비추어보면서 결정에 어려움을 겪곤 한다.



이 책은 원서의 표지로는 몇 차례 접한 적이 있었으나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다. 번역된 원고를 일부 받아 살펴보았고, 본문 작업을 먼저 시작하게 되면서 이미지와 내용에 심취하게 되었는데 이미지도 좋지만 내용에서 핑크의 역사, 사물, 인터뷰, 실험 등 우리 삶에 밀접한 영역의 것들과 연관지어 폭넓게 다루고 있기에 흥미로웠다.

에디터와의 미팅에서 책 자체가 핑크 덩어리로 보였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기억에 남았는데, 핑크 덩어리로 보여지기 위해서는 책 전체가 핑크여야 하고 심플해야 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그런 톤으로 시안을 잡게 되었다. 게다가 타이틀을 영문으로 넣기로 해서 좀 더 세련되고 차분한 느낌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시안의 길

이쁜, 아주 이쁜 핑크를 쓰자. 톡 튀면서 채도가 적절히 높은 핑크를 전면에 깔고, 타이틀 Pink Book을 깔끔하게 배치한 뒤 부제와 로고를 넣었다. 좀 허전한가 싶어 중앙에 핑크박을 사각형 형태로 찍거나 형압으로 누르는 후가공을 상상하며 시안을 잡아보았다. 본문에 있는 일러스트들 중에 임팩트 있는 핑크 혹은 표지에 사용하기에 적합해 보이는 이미지를 골라 뒷표지에 장식적으로 넣어보기도 하고, 앞날개, 뒷날개에도 일러스트를 크롭하여 이미지 자체보다는 다양한 핑크 느낌 자체를 보여주려고 했다. 수영하는 사람, 여자들의 얼굴, 핑크 붓터치, 핑크 물감 등 질감이나 이미지 표현도 다양하여 한 사람이 그린 그림이 맞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첫 번째 시안을 보내고 비교적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는데.. 이 예감은 대부분 맞지 않는 듯하다. 

다소 밋밋하고 무슨 책인지 알 수가 없으니, 앞표지에 어떤 이미지가 들어갔으면 했다. 모든 것을 덜어내고 그냥 Pink Book 만 보이는 컨셉의 표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본문에 있는 이미지들 중 어떤 것들을 활용할 수 있을까 후루룩 살펴보며 하나씩 하나씩 넣어보았다. 원래는 핑크 감옥 이미지였으나 감옥을 확대하니 철장이 아름다운 라인으로 보이기도 했고, 핑크 군함이 떠있는 바다의 물결을 부분적으로 사용하니 그냥 아름다운 웨이브로 보였다. 어떤 이미지든 부분적으로 잘 크롭하면 정말 뜻밖에 좋은 이미지로 활용될 수 있다. 

핑크 지우개, 솜사탕, 면도기, 양말, 우주, 꽃, 하트까지 내가 좋아하는 이미지들을 모~두 넣어보았다. ‘음, 이 정도면 됐군’ 어찌됐든 예쁜 이미지로 채워진 책이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엇을 넣어도 예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해보기에는 뭔가 아쉽다. 다시 한번 다양한 이미지들을 끌어와 배경에 다양하게 깔아보기도 하고, 패턴과 이미지의 조합 외에 영문 서체와 핑크의 종류까지 다 조합을 해보니 페이지도 52개의 시안이 나왔다. 52개.. 사실 나는 이렇게 저렇게 실험을 해보다가 데이터를 지우지 않고 추가해서 100개가 나온 적도 있다. 물론 이 시안을 다 보내지는 않지만, 우연히 나온 시안이 다른 책에 사용되는 경우도 종종 있기에 절대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또 버려진 시안에서 나온 스케치가 좋은 소스로 활용되기도 한다. 어쨌든 버리지 않는 이 습관 때문에 강의를 할 때도 자료가 풍부한 편인데, 그 풍부한 자료 때문에 컴퓨터 정리를 부지런히 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이 52개의 조합이 다 마음에 들었다는 것인데, 52개를 다 보낼 수는 없기에 고르고 골라 30개만 보냈다. 메일로 파일을 보내고 잠시 무언가 하나 안 해본 것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꼭 해봐야만 아는 것인데 메일을 보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든 적도 처음이 아니다. 왜 꼭 보내고 나면 떠오르는 것일까. 에디터의 의견으로 군함의 물결과 수영하는 여자를 합성해보기도 했고, 작게도 넣어보았으나 크게 키워볼 생각은 하지 않았기에 뒤늦게 그 이미지를 앞표지를 벗어날 정도로 크게 키워보니 수영하는 모습이 마치 핑크 속으로 뛰어드는 느낌이 들어 시원하고 좋았다. 기존 이미지의 배경을 없애고 여자 이미지만 누끼를 따서 배치했기 때문에 배경의 컬러를 별색으로 지정할 수도 있었다. 기존 이미지 자체만으로는 별색 핑크를 사용하는 작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스스로 만족할 이미지를 찾아 엄청난 양의 조합을 하면서, 왜 이 조합을 꼭 해봐야 알까, 왜 모든 이미지는 만들어봐야만 알 수 있을까. 그냥 상상만으로도 이건 좋지, 아니지 라고 판단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건 천재인 것이겠지’. 혼자 웃음이 난 적도 있다. 누군가가 이렇게 이렇게 해봐주세요 라고 말하면 ‘네, 일단 해보겠습니다.’ ‘ 해봐야 알 것 같아요’라고 말했는데 그럴 때마다 왜 꼭 해봐야 아는 걸까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상상하는 것과 만들어서 보는 게 다른 것은 왜일까.  

그렇게 만들어 낸 결과물은 지극히 안정적이고 평범하다. 누가 봐도 몇십 개의 조합 끝에 나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디자인은 절대적인 시간과 고민이 필요하다는 게 결론이다. 간단한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여러 번 확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오는데 필요한 시간이 매우 단축되었다. 스스로 만족스럽고 기뻤다. 어찌 보면 엄청난 훈련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토록 오랜 시간 많은 양의 작업을 했는데 아직도 훈련을 해야 하다니... 그런데 그런 과정도 즐겨야만 한다.



처음 의도대로 뒤표지는 차분한 앞표지와 반전되는 분위기로 가고 싶었기 때문에 키워드에 맞는 이미지들을 귀엽게 넣고, 그 원형 테두리에 유광 은박을 찍었다. 앞표지에서 알 수 없는 것을 뒤표지에서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날개 부분도 시원시원하게 물결 이미지를 깔았고, 앞표지의 안쪽에도 핑크 물결을 전체에 깔았다. 결국 표지 전체에 수영하는 여자와 물결의 컨셉으로 디자인 된 셈이다. 내 나름대로 ‘핑크 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여자’를 상상하며 조합된 이미지이다. 감리를 보면서 원하는 핑크에 맞추기 위해 신경을 많이 쓰게 되었는데 처음에 나온 컬러가 완전히 달라보여서 마음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었으나, 기장님이 곧 바로 잡아주셨다. 인쇄할 때 핑크 등 네온 컬러만큼은 이제 상상한 것과 잘 맞는데 그래도 눈으로 봐야만 직성이 풀린다. 어쨌든 의도한대로 다양하고 풍성한 핑크를 잘 찍어주셨다. 이제 식은땀 흘릴 일은 없겠지.


핑크북 Pink Book
핑크북 Pink Book
케이 블레그바드 저 | 정수영 역
덴스토리(DEN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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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석윤이(그래픽 디자이너)

열린책들에서 오랫동안 북디자인을 했다. 현재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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