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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시간> 눈에 보이는 시간만이 현재가 아니다

실타래 같은 삶, 원점으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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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시간>은 그런 영화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뭉쳐있는 삶의 실타래 하나를 붙잡아 어떻게든 풀어보려 하지만,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이의 사연을 다룬다. (2020. 06. 25)

영화 <사라진 시간>의 한 장면

세상은 미로다. 우리는 미로 속에서 헤매며 삶의 탈출구를 찾으려고 무수한 선택의 순간에 맞닥뜨린다. 올바른 길에 들어서기도 하고, 벽에 막혀 돌아서야 할 때도 있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선택을 유예할 때도 있다. 쳇바퀴 구르듯 돌고 돌아 겨우 찾은 출구는 알고 보면 미로의 입구다. <사라진 시간>은 그런 영화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뭉쳐있는 삶의 실타래 하나를 붙잡아 어떻게든 풀어보려 하지만,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이의 사연을 다룬다. 

박혁구(조진웅)는 형사다. 시골 마을에 화재 사고가 발생한다. 서울에서 내려온 수혁(배수빈)과 이영(차수연) 부부가 질식사했다. 시체가 발견된 장소는 집 안, 창살 문으로 잠겨 있던 다락방이다. 마을 사람들 몇몇이 용의 선상에 오른다. 이들의 진술을 들어보니, 아내 쪽에 병이 있었다. 밤만 되면 다른 사람의 혼이 몸속에 들어온다. 행여 생길지 모른 불상사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부부와 합의로 창살 문을 설치하여 밤 동안만 이들을 가뒀다.   

말도 안 돼, 혁구는 믿을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이 검거를 피하려고 꾸민 이야기라 확신한다. 이들이 내민 술을 받아 마신 게 실수였다. 술이 과해 그만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니 사람들이 자신을 피해자 부부의 남편 수혁으로 알아본다. 동료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살던 집으로 가니 아내와 자식도 증발했다. 누구 하나 자신을 형사 혁구로 받아들이는 이가 없다. 혁구로 살아온 그동안의 시간이 사라졌다!

혁구는 꿈을 꾸는 것만 같다. 어서 빨리 이 꿈에서 깨어났으면 좋겠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해 찾아간 상담병원의 원장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이런 얘기를 한다. “꿈이란 기억 속에 있는 불필요한 파편의 쓰레기 소각 같은 겁니다. 자면서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욕망의 쓰레기 소각이 꿈이고요. 의식 속에서 벌어지는 욕망의 쓰레기 소각은 상상입니다.”

로베르토 볼라뇨가 쓴 소설 『칠레의 밤』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인생이란 우리를 최후의 진실, 유일한 진실로 이끌어가는 오류의 연속이다.’ 인생에 있어 최후의, 유일한 진실이라면 삶과 죽음이다. 그리고 이 둘을 하나로 이어야 인생이 완성된다. 그래서 삶은 직선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변수가 작용하여 곧게 흐르는 시간에 굴절을 가하여 돌고 돌아 원의 형태를 완성한다. 

혁규에게 있어 자신을 수혁으로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말하자면 ‘굴절한 현재’ 혹은 ‘연장된 현재’이다. 이에 대해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에서 사람들이 둥근 지구를 평평하다고 착각해 눈앞에 보이는 것만 인식하는 것처럼 현재 또한 지금 이 시간과 공간에만 한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현재란 작은 시간적 간격의 연결망 같은 것이어서 그 안에 공간과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 등이 녹아 있다는 것이다. 


영화 <사라진 시간>의 포스터

연장된 현재를 다루는 <사라진 시간>에서 혁구가 자신이 꼭 꿈을 꾸는 것 같다고, 환상에 빠진 것만 같다고 느끼는 건 그가 이상하기보다는 현재를 지금 이 시간, 이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로만 인식해온 일종의 착각의 결과다. 혁구는 망상이라고, 혁구를 상담한 의사는 쓰레기 소각이라고 표현한 꿈과 환상 또한 엄연히 연장된 현재에 속한 개념으로 그것들이 모두 뭉치고 뒤엉켜 거대한 원, 즉 세계를 이루는 것이다. 

<사라진 시간>의 처음과 마지막은 똑같이 혁구가 거리를 걷는 장면이다. 처음엔 혁구 주변을 스쳐 가는 이들이 눈에 띄지 않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혁구의 시간과 관련 있는 인물이라는 게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일련의 사건과 소동을 겪고 현재라는 시간에 관대해지고 나니 혁구에게 또 다른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털 뭉치와 같은 세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거기서 삐져나온 실 한 줄을 잡고 어떻게든 풀어보려 했던 혁구는 더는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다. 

이제 현재라는 실을 풀기보다 그 실을 가지고 뭐든 만들어 볼 생각이다. 인생은 실을 길게 한 줄로 늘어뜨리는 것보다 뭐든 뜨개질로 형태를 만들어 완성할 때 아름다워진다. 다시 돌아온 출발점이지만, 처음 출발할 때와는 풍경이 많이 달라졌다. 연장된 현재를 받아들이고 나니 세상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혁구는 마지막 대사로 이렇게 말한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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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허남웅(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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