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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의 더 페이보릿] 사실은, 그런 여자들이 있어 - 김도영 감독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만든 김도영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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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은 다른 영화에 비해 조조 관람률이 높은 작품이었다. 주말 현매는 크게 오르지 않아도 평일 예매는 꾸준했다.

김도영 감독


문화평론가 손희정이 격주 수요일마다,

지금 이 시대의 여성 영화감독의 이야기를 '손희정의 더 페이보릿'에서 펼칩니다.


“색이 구별되지 않는 세계에서 각각의 색을 구별할 수 있게 되듯이, ‘당신이 스쳐지나간 사람도 사실은 이런 이야기를 품고 있어, 그런 여자들이 있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처럼 원작을 읽고 의미를 발견했던 독자를 배반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베스트셀러, 아니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면서 일종의 사건이 된 소설 『82년생 김지영』(조남주)을 영화화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김도영 감독(이하 김도영)은 이렇게 답했다.

제작 발표를 한 지 1년 만인 2019년 10월, 영화 <82년생 김지영>(이하 <김지영>)이 개봉했다. 영화를 둘러싸고 많은 말들이 뜨겁게 오고 갔다. 그 안에는 개봉 전부터 시작된 별점 테러도 있었고 지지의 목소리도 있었다. 영화에 대한 호평과 혹평이 공존했다. 뭐가 되었건 <김지영> 덕분에 사람들과 나눌 수 있었던 대화들은 소중했다. 영화는 여성서사뿐만 아니라 한국 페미니즘에 대한 담론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었다. 그 한 가운에 있었던 감독 김도영은 어땠을까? 함께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았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 컷

<자유연기>에서 <김지영>까지, 퍽 하고 퓨즈가 나간 순간

최근 우리를 들뜨게 했던 대체의 여성감독 작품들과 달리 <김지영>은 거대 투자배급사가 붙은 상업영화다. 화제성이 큰 작품인 데다가 신인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니, 자본의 개입이 만만하지 않았을 터다. 김도영은 어디까지 자신의 색을 살리고 어디에서 멈춰 서야 했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알린 계기가 되었던 단편 <자유연기>(2018)를 보고 나서야 알았다. <김지영>은 확실히 김도영의 영화였다.

<자유연기>는 30대 배우 ‘지연’(강말금 분)의 이야기다. 그는 출산 후 육아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와중이다. 마찬가지로 배우인 남편은 말만 ‘돕겠다’고 할 뿐, 그저 제 한 몸 살피기도 힘들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연은 유명 감독이 새로 들어가는 영화에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전화를 받는다. 하지만 딱 반나절, 아이를 봐줄 사람을 찾는 일이 만만하지가 않다. 우여곡절 끝에 참여한 오디션 분위기는 실망스럽고... 영화의 마지막, 지연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답답함을 ‘자유연기’로 쏟아낸다. 최근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로 주목을 받고 있는 강말금 배우가 원쇼트로 끌고 가는 이 독백 장면은 그야말로 절창이다.

김도영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유연기>와 <김지영>은 꽤 다른 영화지만, 놀라울 정도로 닮은 부분이 있다. 그건 바로 스크린 위로 스며나오는 지연과 지영의 정서다. 일상을 정신없이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에 퍽- 하고 퓨즈가 나간 듯, 갑자기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순간. 그러나 그건 그저 하나의 표정, 하나의 장면이 아니다. 그 안에는 어떤 식으로도 충분히 언어화할 수 없는 공허함과 불안의 정서가 녹아 있다. 이야말로 <김지영>에서 우리가 봐야 했던 ‘바로 그것’ 아니었을까.


영화 <82년생 김지영> 촬영 현장

지영이가 일어선 자리에 또 다른 지영이가 앉다

하지만 그런 정서의 포착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은 아니다. 김도영이 <김지영> 프로젝트에 합류했을 때 시나리오 초고가 나와 있었고, 주연배우 캐스팅도 끝난 상태였다. 이미 되어 있는 세팅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여전히 부족한 부분은 보충하면서, 김도영은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갔다. 특히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디테일을 구성하면서 원작 소설에 등장하는 대사와 사건들에 ‘영화적 숨’을 불어넣었다.

<김지영>에는 사소해 보이지만 나도 모르게 사로잡히는 순간들이 있었다. 지영(정유미 분)이 유모차를 끌고 나와 공원 벤치에 앉아 커피를 한 잔 마시다가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하게 살아서 좋겠다”는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떠나는 장면도 그랬다. 지영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유모차를 밀면서 다가오는 여자와 가벼운 목례를 주고받고 컷이 바뀐다. 그 목례의 순간이 좋았다고 말하자, 김도영이 설명했다.

“지영이가 일어선 그 자리에 그녀가 앉을 터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서 그 역시 같은 혐오 발언을 듣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놀라웠다. 소설 속 ‘김지영’은 구체적인 얼굴을 지움으로써 보편성을 획득한 존재다. 영어, 일어, 중국어 등 다양한 번역본이 출간됐지만, 거의 모든 판본의 표지에 김지영의 얼굴이 없는 건 그 때문이다. 영화는 그 텅 빈 자리에 어떻게든 한 개인의 얼굴을 부여하기 위해 고심했다. 그러나 동시에 가벼운 목례 하나로 지영의 경험은 다시 보편의 경험으로 연결된다. 

“영화에서 딸 아영이가 딱 한 번 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가 운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된다. 하지만 지영이의 고통은 단지 아이가 울어서라거나, 못된 남편, 못된 시어머니 때문이 아니다. 남들 보기에는 좋은, 혹은 ‘정상’이라고 불리는 가정. 그 이면에도 여성을 소외시키는 구조가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영이도 많이 울게 하지 않았다.”

<김지영>은 확실히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임을 이미지화하는 세밀한 설정들에 강하다. 무엇보다 영화가 정성과 시간을 들여서 지영의 가사노동을 카메라에 담는 것은 인상적이다. 지영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상을 차리고, 치우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갠다. 흥미로운 건 남편 대현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는 집 안에서의 젠더 배치를 통해 돌봄노동은 ‘쉬는 것’도 ‘노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게 지영은 ‘가부장제의 여자’로, 대현은 ‘가부장제의 남자’로 성별화된다.

<김지영>이 ‘참여형 영화’가 된 건 이런 디테일들 덕분이었을 터다. 어느 날 김도영은 영화를 보고 나온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친구는 육아 때문에 조조를 보러 갔는데, 아침부터 극장에 여자들이 가득 차 있었다고 했다. 친구가 말했다. 영화 시작부터 관객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영화를 보더라고.

“지영의 시어머니가 선물을 내미는 장면이 있다. 한 관객이 ‘저거 장바구니 아니야?’라고 말했고, 다른 관객이 ‘나도 장바구니 받았어’ 하고 답했다더라. 또 영화를 보다가 사람들이 울기 시작했는데, 두루마리 휴지가 객석을 돌다가 친구에게까지 오기도 했다.”

<김지영>은 다른 영화에 비해 조조 관람률이 높은 작품이었다. 주말 현매는 크게 오르지 않아도 평일 예매는 꾸준했다. 영화관에 가서 즉흥적으로 선택하는 영화라기보다는, 보기 위해서 계획하고 찾아오는 영화라는 의미다. 그렇게 시간을 내서 모여 앉은 여성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서로 대화를 나눴다. 확실히 영화 <김지영>에는 각자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힘이 있었다.


배우 정유미(왼쪽)과 김도영 감독

<김지영>과 함께 나 역시 변했다

“부족함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김지영>은 자신의 몫을 충실히 해낸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좀 더 급진적인 이야기를 했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됐을까’ 이런 궁금증이 움트기 시작했다. 내가 뭔가 깨달아서 작품을 했다기보다, 만들면서 깨달았고, 또 작품이 자기 생명을 가지고 움직이면서 나 역시 함께 변했다. 나는 여전히 과정 중에 있다.”

<김지영> 다음에는 어떤 작업을 하고 싶냐고 묻자, 김도영이 한 말이다. “<김지영>을 했다고 해서, 그 다음에 꼭 여성서사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꼭 사회적 이슈를 다루지 않아도 괜찮다”는 선배의 조언이 오히려 자신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고 덧붙였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건 여전히 여성의 이야기라고.

그의 다음 작품이 무엇일지 우리는 아직 알 수 없다. 나는 어떤 이야기여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만든 영화 안에서도 무언가를 배워 그 다음을 꿈 꾸는 사람이다. 그 태도가 나를 기대하게 한다.



82년생 김지영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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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손희정(문화평론가)

페미니스트 크리틱. 논문 〈21세기 한국영화와 네이션〉으로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시, 쓰는, 세계》《페미니즘 리부트》와 《성평등》을 썼고, 《을들의 당나귀 귀》와 《그런 남자는 없다》를 책임 편집했다. 함께 쓴 책으로는 《대한민국 넷페미史》, 《페미니스트 모먼트》, 《그럼에도 페미니즘》, 《소녀들》,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 《누가 여성을 죽이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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