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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아영의 잘 읽겠습니다] 어쩌겠어요
<월간 채널예스> 2020년 6월호 이원하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제주에서 혼자 살며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은 때로 너무 크고 깊어서 무한한 자연 같다. (2020. 06. 04)
사랑에도 이기고 지는 일이 있을까? 사랑은 게임도 승부도 아니지만, 어쩐지 매번 이기는 사람도 지는 사람도 따로 있는 것 같다. 두 사람의 마음의 기울기가 늘 평행을 이룰 순 없다면, 한 사람은 관계에서 더 많은 무게를 감당하게 되곤 한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라면, 사랑이 너무 많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계산도 밀당도 자존심도 아무 소용이 없을 만큼 빠져버린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신해경의 노래 〈권태〉([나의 가역반응], 2017)를 들으며 한 생각이다. “오늘은 따라 갈래요/안 된단 말 하지 마요/나는 그대에게 하고픈 말이 많아/하지만 늘 잊어버리죠” 오늘은 그대를 따라가겠다고 호기롭게 던져놓고서는 안 된단 말은 하지 말라고 덧붙이는 마음에는 어쩔 수 없음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명령문이지만 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거절은 거절해요. 왜냐하면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에 거절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어서요. 그대를 따라가겠다는 의지도, 안 된단 말은 하지 말라는 부탁도, 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이원하의 첫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문학동네, 2020)에도 사랑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제주에서 혼자 살며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은 때로 너무 크고 깊어서 무한한 자연 같다. “물이 몇 장으로 이루어져야 바다가 되는지/수분은 알까요”(「약속된 꽃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묻는 말들」)라며 마음의 양을 따져보다가도, “차오르다 차오르다 뚜껑만 닫으면 되는데/그게 안 됩니다”(「나는 바다가 채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 같다」)라며 마음의 조절에 실패하고 만다. 깊이를 따져볼 수도 크기를 조절해볼 수도 없을 만큼 사랑에 빠진 시인이 속수무책의 심정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코스모스는 매년 귀밑에서 펴요//귀밑에서 만사에 휘둘려요/한두 송이가 아니라서/휘둘리지 않을 만도 한데 휘둘려요//어쩌겠어요//먹고살자고 뿌리에 집중하다보니 하늘하늘거리는 걸 텐데/어쩌겠어요”(「코스모스가 회복을 위해 손을 터는 가을」) 두 손이 묶여 어찌 할 도리가 없다니 차라리 속 편해지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질 때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내게도 어떠한 조치가 필요해요”(「풀밭에 서면 마치 내게 밑줄이 그어진 것 같죠」)
시인은 그 조치를 알아내려 혼자 풀밭에도 나가보고 밤하늘에 무럭무럭 핀 별들도 바라보고 살결이 푸른 바다도 관찰하고 금세 사라져버리는 무지개도 살핀다. 그런데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의 마음을 안고 자연 속에 있다 보니, 놀랍게도 시인은 자연의 이치를 다 알아버리고 만다. “하늘이 깊은 잠에 들지 못하는/이유가 다 보인다//(...)//식물이 비를 기다리는 이유를/하늘은 알까, 안다면/진한 감정 하나 때문이라는 것도 알까//그 감정을 감추기 위해/구름보다 안개를 부른 것까지도 알까//(...)//알긴 뭘 알까”(「하늘에 갇힌 하늘」)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사랑에 대한 조치를 찾아내려다보니, 다시 말해 당신을 너무 사랑하다보니, 하늘이 잠들지 못하는 이유도, 식물이 비를 기다리는 이유도, 무지개가 오래 머물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이유도, 다 알아버리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를 통달해도 미지로 남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방법. 내 마음을 몰라주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나는 여전히 지는 사람이다. 결국 시인은 대단한 조치도 뾰족한 대책도 찾지 못하지만, 시집의 제목과 ‘시인의 말’에 능청스럽기도 귀엽기도 절박하기도 한 거짓말을 꺼내놓는다. “저 아직도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시인은 여전히 사랑에 속수무책으로 지는 사람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능청스럽고 귀엽고 절박한 사랑으로 가득한 이 시집의 매력에 유혹당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속수무책의 일이라서, 이원하의 시라면 앞으로 언제라도 조치도 대책도 없이 기꺼이 지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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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비평집 『문학은 위험하다』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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