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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희 칼럼] 번역가의 개입은 어디까지 허락되는가
<월간 채널예스> 2020년 6월호
자막은 텍스트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가의 삶을 투영해 창조된 결과물이다. (2020.06.02)
8~9년 전엔가 혈기왕성하던 시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번역은 해제(解題)에 불과한 거 아니냐? 왜 번역가가 의역을 하는 거냐”라는 사람을 만나 댓글 창에서 머리채를 붙들고 싸운 적이 있다. 쉽게 말해 자막은 설명서 정도가 아니냐는 지적이다. 아예 그런 면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저 말을 듣고 발끈하지 않을 번역가는 없지 않겠나.
관객의 수준이 전보다 많이 올라간 지금 저런 소리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번역가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지는 관객은 물론 번역가 사이에도 아직 여러 의견이 있다.
“유리가 없다고 착각할 정도로 한없이 투명한 유리가 되기” 오랜 세월 번역가의 모범적인 자세로 자주 인용되는 니콜라이 고골의 이 말은 흥미롭게도 정반대의 뜻으로 해석된다.
하나는 저 문장 그대로 번역가가 자기 색을 지우고 원작자가 사용한 단어, 표현, 문장을 최대한 살리는 투명한 유리로 기능해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번역가가 적극적이고 자연스러운 의역을 통해 원문과 모국어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게끔 투명한 유리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 다 원문과 독자의 거리를 제로로 만들어 번역가의 존재를 투명하게 하려는 시도가 목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방법은 정반대다. 보통 전자의 방식은 원문에 있는 문화적 낯섦을 유지해 모국어처럼 자연스레 읽히지 않는다. 반면 후자의 방식은 문화적 낯섦을 제거하거나 최소화해 모국어에 가깝게 읽힌다.
어떤 것이 진짜 투명한 유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번역에서만큼은 후자의 방식으로 얻는 이득이 더 크다. 자막은 글이 아니라 말이기 때문이다. 말의 영역에선 낯섦이 오히려 이해의 흐름에 방해될 때가 많다. 관객은 문화적 낯섦을 배우려고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캐릭터들의 상호작용으로 흘러가는 내러티브의 맛을 즐기려고 영화를 본다. 문화적 낯섦을 살리겠다고 사전적인 의미로 투명한 번역을 하다간 멀쩡히 살아 있는 캐릭터들을 죽이기 십상이다. 살아있는 캐릭터의 입술엔 현실에서 사용하는 살아 있는 언어를 얹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자연스러운 의역뿐이다.
자막의 문화적 낯섦을 최소화하고 모국어에 가깝게 읽히게 하려면 섬세한 의역 기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술은 필연적으로 번역가가 살아온 삶과 가치관, 말투 등 다양한 경험들을 반영하기에 개인의 인성을 완벽하게 배제하고 번역할 수 있는 존재는 사실상 번역기뿐이다. 자막에서 번역가의 존재감이란 생선 껍질 벗기듯 깨끗하게 분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올해 개봉했던 영화 <1917>에서 스코필드가 전우인 블레이크와 무인지대를 통과하려던 장면에서 먼저 진입하려던 블레이크를 잡으며 자신이 먼저 가겠다고 “Age before beauty”라고 말한다. 이 문장의 원뜻은 “미녀보다 노인 먼저”이며 여기서 미녀는 보통 젊은이를 뜻한다. 나이를 대접한다는 뜻인데 이 장면의 한국어 자막은 “장유유서지”로 나갔다. 뜻만 살피면 일대일로 완벽하게 일치하는 표현이다. 다만, 이러면 영국인이 삼강오륜을 안다는 게 되므로 뭔가 황당한 설정이 되고 만다.
평소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냐”, “짚신도 짝이 있다” 등의 한국 색 짙은 문장을 자막에서 최대한 지양하는 편인데 “장유유서지”를 쓴 것은 대사의 음절이라거나 표현의 명료성이라거나 다양한 이유가 있다. 일단 그 이유에 앞서 내가 ‘장유유서’라는 말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유교권 국가에서 자라서 정서적으로 해당 장면에서 저 표현을 훨씬 가깝게 느꼈고 한국 관객들도 그럴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막은 텍스트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가의 삶을 투영해 창조된 결과물이다. 물론 “장유유서”보다 “젊은이보다 노인 먼저”라는 자막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니까 뭐가 더 낫다, 옳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현실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표현이 전자라는 점엔 그리 이견이 없을 것이다.
“번역가가 자막에 얼만큼 개입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식상하고 촌스럽다. 당연히 개입이 과해도 덜해도 안 되고 번역가는 끊임없이 그 기준선의 위치를 고민해야 한다. 다만 자막에서 번역가의 존재를 지워야 한다느니 한없이 투명해져야 한다느니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하나 마나 한 게으른 소리는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자막은 번역가가 사는 집이다. 궁색한 번역가를 내쫓아 봐야 남는 건 온기 없이 텅 빈 건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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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이자 남편, 아빠이다 2005년부터 번역을 시작하여 주로 영화를 번역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보헤미안 랩소디>, <캐롤>, <데드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