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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리> 소리를 잃고서야 비로소 들리는 소리
가족이라는 불완전한 원
가족이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의 불완전한 형태로 원을 그리지만, 같은 존재로 완벽하게 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보리에게 가족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2020.05.14)
영화 <나는 보리>의 한 장면
(* 영화 중반의 작은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녀가 스크린 안으로 들어온다. 어느 세계로 끼어들고 싶은 모양이다. 소녀의 이름은 보리(김아송)다. 아침잠에서 깨어 누워있는 아빠(곽진석) 옆구리에 착 ‘달라붙는’ 행동이 귀엽다. 동생 정우(이린하)도 누나 보리 옆을 파고든다. 두부를 썰어 된장찌개를 준비하는 엄마(허지나)가 뒤엉킨 이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가족이라니! 보리에게는 부족할 게 하나 없어 보인다.
아니다, 하나 불만이 있다. 가족 안에서 자신만 소외당하는 기분이다. 영화는 단란하게 식사하는 가족을 자주 비추지만, 카메라 구도상 보리는 엄마와 아빠와 정우의 삼각형 밖에서 하나의 점으로 삐죽 튀어나와 ‘달라붙어’ 있는 듯하다. 이 구도에는 사연이 있다. 보리는 엄마와 아빠와 정우와 다르게 듣고 말할 줄 안다. 엄마와 아빠와 정우는 소리를 듣지 못해 수화로 소통한다. 보리도 수화로 대화에 끼어들지만, 충분히 소통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도 소리를 잃었으면 좋겠어! 단짝 친구 은정(황유림)에게 고민도 털어보고, 등굣길에 지나치는 작은 사찰에 소원도 빌어보지만,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다. 이어폰을 끼고 볼륨을 최고로 높여 시끄러운 음악을 들어보고, 세면대에 물을 가득 채워 귀에 잔뜩 들어가도록 얼굴을 담가보아도 소용이 없다. 자주 가는 방파제 길의 바닷속으로 풍덩! 빠져 정신을 잃고 깨어나 보니 병원 입원실의 침대다. 그 후유증으로 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실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을 하는 거다. 엄마와 아빠와 정우와 완전히 똑같은 조건을 갖춘 건 아니어도 외관상 가족과 하등 다를 바가 없어졌다. 이제 점으로 달라붙지 않고 당당히 삼각형의 가족 안에 들어가 또 하나의 선을 연결해 사각형을 완성했다. 그런데 이 사각형이 반듯하지 않다. 기우뚱하다. 왜 그럴까, 보리는 갸우뚱하다. 엄마와 아빠도 보리가 소리를 잃은 것에 대해 괜찮다고 위로해도 보리 자신이 괜찮지 않다.
들리지 않(은 척을 하)게 되니 이전에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려서다. 학교 청소를 두고 학급 친구들이 보리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자기들끼리 쑥덕이며 불편한 화장실 청소를 일방적으로 배정한다. 엄마와 함께 간 옷 가게에서는 대놓고 벙어리라 놀려대고 가격까지 바가지를 씌운다. 소리가 들릴 때는 가족 안에서 소외감을 느꼈는데 소리가 안 들리(는 척을 하)니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것 같다. 보리는 도대체 어느 쪽에 서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실은 보리는 엄마와 아빠와 정우, 즉 세 개의 선을 연결하는 꼭짓점 같은 존재다. 보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가족 대신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전화를 받고 그 소리를 대신 수화로 통역해 엄마와 아빠와 정우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렇게 가족이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의 불완전한 형태로 원을 그리지만, 같은 존재로 완벽하게 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보리에게 가족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영화 <나는 보리>의 포스터
다행히(?) 안 들리는 척을 하면서 겪은 일련의 소동으로 다르기 때문에 같을 수 있다는 의미를 희미하게나마 이해할 것만 같다. “들리든 안 들리든 우리 똑같아” 보리에게 성장은 다르다는 걸 인식하고 공존을 알아가는 순간에 찾아온다. 가족에게서 보리가 소외감을 느낄 일은 없을 터. 이제 가족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니 또 낯설다. 세상이 보리 가족을 원 밖으로 밀어내는 것만 같다.
첫 장면에서처럼 보리는 마지막 장면에도 방파제 위를 걷고 있다. 같은 행위라도 카메라의 구도는 달라서, 첫 장면이 보리의 상체를 비추는 미디엄 숏이었다면 마지막은 보리가 풍경에 묻혀 보이는 롱 숏이다. 가족 안에 소속되길 바랐던 첫 장면의 보리와 다르게 마지막 장면에는 바다와 육지를 가르는 경계에 있다. 가족보다 더 큰 세상에 나온 보리는 또 다른 성장의 갈림길에 서 있다. 육지의 바람에 흔들리고 파도에 휩쓸릴지라도 다름을 받아들이고 공존을 이해한 보리에게는 긍정적인 미래가 기다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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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