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황석희 칼럼] 해석은 되는데 번역은 좀...?

<월간 채널예스> 2020년 4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번역가들이 외국어 해석을 못 해서 오역을 낸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물론 해석에 실패한, 빼도 박도 못하는, 변명의 여지 없는, 창피한 오역도 있지만 성급함과 덜렁댐으로 인한 실수가 대부분이다. (2020.05.11)

황석희 4월호.JPG

 

 

“fuck off, don’t waste my time”을 번역하면?

 

10초만 생각하고 맨 끝에 있는 번역문을 보고 오자.

 

보통 번역이라는 행위는 독해나 해석의 영역 다음에 있다. 번역가들이 문장 하나를 번역하는 데 100초가 필요하다면 뜻을 파악하는 시간은 길어야 10~20초고 나머지는 문장을 만드는 시간이다. "내 시간 낭비하지 마"라는 해석은 초중고 영어 의무교육을 충실히 받았다면 가능한 것이고 그걸 "시간 아까워"로 옮기는 것이 번역이다. 이 정도 수준의 번역은 프로 번역가면 다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직역과 의역의 차이가 아니라 해석과 번역의 차이다. 예문의 “시간 아까워”가 정답이라고 할 순 없다. 저게 가장 좋은 번역이라는 뜻이 아니라 해석과 번역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든 예문일 뿐이니 오해 없길 바란다.

 

번역가들이 외국어 해석을 못 해서 오역을 낸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물론 해석에 실패한, 빼도 박도 못하는, 변명의 여지 없는, 창피한 오역도 있지만 성급함과 덜렁댐으로 인한 실수가 대부분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번역가가 그런 오역을 거의 매번 한두 개씩은 낸다. 하지만 그 한 문장만 번역하라 했을 때 오역을 낼 번역가는 정말 드물다. 오역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가장 먼저 그 번역가의 외국어 실력을 의심하지만 그 번역가들 중엔 초중고, 대학까지 해외에서 나온 사람도 있고 아예 외국 국적자인 사람도 있다. 오역은 외국어 실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간혹 교포, 유학생 중에 해외 거주 기간이 길다거나 영어 실력에 아주 자신 있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번역하고 싶다고 쪽지를 보내는 일이 있는데 외국어 구사력은 기본적으로 번역보다는 독해와 해석이 요구하는 능력의 범위 안에 있다. 다시 말하지만 본격적인 번역은 해석 과정을 거친 후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외국어 구사력이 번역에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해외 거주 기간이 길고 원어민 수준으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문화적인 이해도나 친밀도가 높아서 번역문에 조금 더 정교한 뉘앙스를 입힐 수 있다. 그렇다고 엄청난 어드벤티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20년 전만 해도 지금처럼 방구석에서 전 세계 문물을 다 훑을 수 있는 정보 과잉 시대가 아니어서 해외에서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문화적인 요소들이 정말 많았다. 그땐 엄청난 어드벤티지였을지 모르지만 나라와 나라 사이의 거리가 너무나도 좁은 지금은 솔직히 큰 의미가 없다.

 

그래도 내 외국어 실력이면 붙어볼 만하겠다 하는 사람들은 따로 물어볼 것 없이 너무 쉽지 않은 책 5페이지, 혹은 대사가 꽤 있는 영상물 러닝타임 5분을 “내 시간 낭비하지 마”가 아니라 "시간 아까워"와 같은 결로 옮길 수 있는지 자가 테스트해보면 된다. 확신에 가깝게 짐작건대 99.9%는 실망할 것이고 자기 재능을 깨닫는 사람은 0.1%일 것이다. 99.9%에 속한다고 실망할 건 없다. 이 0.1%는 정말 특출나게 비범한 사람이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모두 99.9%에 들어간다고 봐도 된다. 내가 처음 영상물을 번역했을 땐 러닝타임 1분을 번역하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고 그것도 해석의 영역을 넘지 못하는 직역 수준이었다. 당시의 내가 저 5분을 테스트한다면 그 서툰 직역문을 써내는 데만 열 시간이 걸렸겠지.

 

자가 테스트 결과와 상관없이 그래도 번역가가 하고 싶다면 그때부터는 갓 시작하는 여타 번역가들처럼 그 외국어 능력을 바탕으로 번역을 훈련하면 된다. 대사와 자막을 동일한 호흡으로 끊어서 “꺼져, 시간 아까워”, “가라, 시간 축내지 말고”로 쓸지, 아니면 문장을 연결해서 “시간 아까우니까 꺼져”“시간 축내지 말고 꺼져”로 쓸지, 혹은 존댓말을 넣어볼지.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고민하면서.

 

그런데 웃긴 것은 상황에 따라 - 아주 극히 드물겠지만 - “내 시간 낭비하지 마”가 꼭 들어맞는 장면도 나올 가능성이 없진 않다는 것이다. “내 시간 낭비하지 마”는 해석이니까 번역을 하려면 번역답게 옮기라고 원고지 20장을 써놓고 결말에 와서는 무책임하게 “쓸 수도 있겠다”니. 번역 참 재밌고 묘하다.

 

*“꺼져, 시간 아까워”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YES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황석희(영화번역가)

번역가이자 남편, 아빠이다 2005년부터 번역을 시작하여 주로 영화를 번역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보헤미안 랩소디>, <캐롤>, <데드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있다.

오늘의 책

수많은 사랑의 사건들에 관하여

청춘이란 단어와 가장 가까운 시인 이병률의 일곱번째 시집. 이번 신작은 ‘생의 암호’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사랑에 관한 단상이다. 언어화되기 전, 시제조차 결정할 수 없는 사랑의 사건을 감각적으로 풀어냈다. 아름답고 처연한 봄, 시인의 고백에 기대어 소란한 나의 마음을 살펴보시기를.

청춘의 거울, 정영욱의 단단한 위로

70만 독자의 마음을 해석해준 에세이스트 정영욱의 신작. 관계와 자존감에 대한 불안을 짚어내며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결국 현명한 선택임을 일깨운다. 청춘앓이를 겪고 있는 모든 이에게, 결국 해내면 그만이라는 마음을 전하는 작가의 문장들을 마주해보자.

내 마음을 좀먹는 질투를 날려 버려!

어린이가 지닌 마음의 힘을 믿는 유설화 작가의 <장갑 초등학교> 시리즈 신작! 장갑 초등학교에 새로 전학 온 발가락 양말! 야구 장갑은 운동을 좋아하는 발가락 양말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호감은 곧 질투로 바뀌게 된다. 과연 야구 장갑은 질투심을 떨쳐 버리고, 발가락 양말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위기는 최고의 기회다!

『내일의 부』, 『부의 체인저』로 남다른 통찰과 새로운 투자 매뉴얼을 전한 조던 김장섭의 신간이다. 상승과 하락이 반복되며 찾아오는 위기와 기회를 중심으로 저자만의 새로운 투자 해법을 담았다. 위기를 극복하고 기회 삼아 부의 길로 들어서는 조던식 매뉴얼을 만나보자.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