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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에게 먹이를 주지 맙시다

병은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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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대부분 남에게 욕을 들을 거라는 무서움에서 비롯했다.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인터넷에 공개되고 사람들이 이 시국에 왜 직장에 갔느냐며, 왜 사람들을 만났느냐며, 여기는 왜 갔고 저기는 왜 들렀냐며 욕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2020. 05.11)

출처_언스플래쉬_가운데 잘라서 가로 길게 넣어주세요.jpg

언스플레쉬

 

 

연휴 이후로 목이 부었다. 평소에도 조금만 피곤하면 목이 붓는 편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회사에 오자마자 가벼운 두통이 더해졌고, 뉴스에서는 코로나19 확진자가 새로 늘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불안이 시작되었다.


불안이 시작되면 막을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이성적인 판단조차 불안의 먹이가 된다. 이제까지 알려진 확진자의 동선과는 전혀 관계가 없잖아, 하지만 누군가 직장에 나와야만 했고 그게 우리 회사 건물이라면...? 증상도 비슷하지 않아, 하지만 무증상 감염자도 있다고 했지. 생각이 늘어갈수록 몸은 더 아픈 것 같았고, 불안은 옳다구나 하고 생각을 잡아먹었다.


'양성 반응이 나오면 어떻게 하지? 증상 발현은 목이 부은 순간부터라고 얘기해야 하나? 그동안 몇 명이나 만난 거지? 내일 당장 팟캐스트 녹음이 있는데, 내가 녹음해야 되는 분량은 어떻게 하지? 다음주 예정된 인터뷰는? <월간 채널예스> 마감은? 오늘도 회사에 나왔으니 이 층은 전부 격리 대상인가? 회사는 나를 영업방해로 고소하려나?'


급하게 휴가를 내고 집안에 틀어박혀 후두염 증세가 가라앉을 때까지 손톱을 뜯으며 뉴스 피드를 끝없이 내렸던 것도 불안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댓글마다 확진자를 비난하기 바빴다. 하루에 적어도 세 번씩 울리는 재난 문자는 성장 촉진제와도 같았다.


일단 잤다. 전원을 끄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자고 일어나니 증상은 훨씬 완화되어 있었다. 찾아간 병원에서는 목이 좀 부었네요, 하는 말과 함께 인후 스프레이를 뿌려주었다. 그동안 불안했던 나를 비웃듯 모든 것이 별 문제 될 것 없는 상태로 돌아갔다.


불안이 가라앉고 나서야 나의 상태를 이성적으로 생각해낼 수 있었다. 불안은 대부분 남에게 욕을 들을 거라는 무서움에서 비롯했다.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인터넷에 공개되고 사람들이 이 시국에 왜 직장에 갔느냐며, 왜 사람들을 만났느냐며, 여기는 왜 갔고 저기는 왜 들렀냐며 욕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근무 중에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데? - 왜 마스크를 쓰지 않았지? 개념이 없다! 저녁에 국수를 먹으러 나왔다더군. - 집에서 먹었으면 됐지 굳이 밖으로 기어 나와서 국수를 먹었어야 했나! '여의도 00번 확진자'나 '서울 00녀' 같은 이름이 붙었겠지. 서로 협력자가 되기보다 감시자가 된 사회에서 좋은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병은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불안은 이성과 상관없이 작동하는 것처럼, 불안한 마음은 쉽게 다른 사람을 욕하는 마음으로 변한다. 저 사람이 그때 저기만 가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들이 빨리 증상을 알아차렸더라면, 그럼 내가 이렇게 불안해하지도 않았을 텐데! 이 불안은 모두 '00번'의 탓이라고 돌리면 마치 불안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굴게 된다.


연휴 동안 집에만 있었다면, 몸이 건강했다면 나도 마음 편하게 다른 사람을 탓하고 있었을까? 많은 사람이 같은 사람을 욕하고 있으면 나도 욕해도 되겠지 하고 슬그머니 돌을 집어들게 된다. 돌을 던지고 있는 동안에는 돌 맞을 일은 없겠다며 안도하는 건 잠깐이다. 한동안은 내가 뭐라도 하는 것 같고 사회에 기여하는 기분이겠지만, 그 돌은 곧 나에게도 온다. 불안은 쉽게 안도감을 집어삼킨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건 불안에게 또 다른 먹이를 줄 뿐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 133쪽)이다. 나는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저 사람들은 잘만 돌아다녀서 저렇게 되었다고 죄를 씌우는 건 결국 저들보다 내가 덜 나쁜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다 불안하다. 그러니까 남을 욕하는 거로 불안의 자리를 대체하지는 말자. 어차피 불안은 그마저도 자신의 먹이로 쓸 테니까.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저 | 마음산책
2012년 6월부터 2014년 4월까지 약 2년간 〈씨네21〉에 발표했던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연재 글 19편과, 2011년 웹진 ‘민연’에 발표했던 글 2편, 2013년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에 발표했던 글 1편을 묶어 영화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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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의정

uijungchung@ye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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