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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진의 미소 - 기꺼이 책임을 지는 어른의 웃음
응당 자신이 져야 하는 제 몫의 책임을 넘어, 세상에 대한 책임을 나눠지는 사람의 얼굴
왜 굳이 이런 도전을 하냐는 질문 앞에서 한혜진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렇게 말했다. (2020. 05.11)
코로나19로 인해 서울패션위크 2020 F/W가 취소되며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제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21년차 패션모델 한혜진은 선뜻 자신이 그 많은 옷들을 입어 보이겠다고 나섰다. 자비로 스튜디오를 대관하고 스태프들을 섭외하고 런웨이 세트를 짓고 케이터링을 부담해가며 40여개 브랜드의 의상 100벌을 입은 뒤, 그 영상을 온라인에 공개해 패션업계의 활로를 뚫어보겠다는 계획이었다. 이 ‘디지털 런웨이’ 구상을 이야기했을 때 그의 소속사는 말했다. “네가 뭔데?”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오랜 경험으로 무장한 베테랑이라도 하루에 100벌을 갈아입으며 각 의상의 컨셉에 맞춰 포즈를 취하는 건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일이다. 한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혹독한 도전을 하겠다는 사람에게, 선뜻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고 답할 수 있는 회사는 없었을 것이다. 무슨 빚을 진 것도 아니고 어떤 직위가 있어서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네가 왜 이런 도전을 해야 하냐며 만류하고 싶었겠지.
왜 굳이 이런 도전을 하냐는 질문 앞에서 한혜진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렇게 말했다. “진짜 껍데기...? 겉모습으로 일을 하는 직업이라 남들한테 도움을 줄 수도 없고, 그게 좀 속상했던 거 같아요. 근데 '그래, 지금이지. 내가 뭘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잖아?' 라고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패션업계는 종종 필요 이상의 비난을 받곤 한다. 겉모습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인간의 내면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사람들은 너무 쉽게 겉모습을 가꾸는 일은 모두 허망하고 가치 없는 일이라는 식의 말을 내뱉는다. 그 산업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가 걸려있고 엄청난 고민과 노고가 필요하단 사실은 잊은 채. 그런 산업의 최전선에 서 있는 패션모델 한혜진은, 자신과 자신이 몸 담은 산업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돕는 방법을 발견했다. 21세기 들어 인류가 맞이한 가장 혹독한 계절이지만, 그럼에도 인류는 꾸준히 아름다움을 상상해낼 거란 사실을 증명해 보이는 것 말이다. 그리고 일단 방법을 찾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도전을 수락했다. 쥐가 난 발가락을 달래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가누며.
서른을 넘긴 어느 날 문득 ‘사람은 언제 어른이 되는 걸까’ 자문해 본 적이 있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늘어져만 있어도 나이는 저절로 먹는데, 과연 어떻게 나이를 먹어야 ‘어른’이 되는 걸까 하는 불안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 답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응당 자신이 져야 하는 제 몫의 책임을 넘어 세상에 대한 책임을 나눠지는 순간, 사람은 어른이 된다. 무슨 빚을 진 것도 아니고 어떤 직위가 있는 것도 아닐지라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기꺼이 그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바로 그 순간부터. “네가 뭔데 혼자 그런 무거운 책임을 지려 하느냐”는 물음 앞에서, 한혜진은 기꺼이 어른이 되었다.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