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표정훈 칼럼] 단락 강박증 환자의 고백

<월간 채널예스> 2020년 5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지금까지 이 코너에 내가 쓴 글들은 지금 이 글과 다른 한 편을 제외하면 9단락으로 이뤄져 있다. 지금 이 글은 아래 긴 인용 때문에 8단락이다. (2020. 05.11)

1.png

 

 

글 쓸 때 생각의 최소 단위가 한 문장이다. 전체 구성과 주제 전개의 최소 단위가 한 단락이다. 글을 내용에 따라 나눌 때 짧은 이야기 한 토막이 한 단락이다. 바꿔 말해 한 단락만으로도 짧은 이야기 하나가 되는 것이 좋다. 잘 쓴 글은 한 단락만 따로 떼어놓고 읽어보아도 완결성이 어느 정도 있다. 비교적 완결성 있는 단락들이 잘 연결되어 있으면 좋은 글이다.

 

나는 ‘단락 길이 강박증(?)’이 있다. 가급적 각 단락 길이, 분량을 비슷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 처음엔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다. 지금은 의식하지 않아도 한 단락 길이는 원고지 1~1.2매 정도이며 1.5매 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어떨 때는 강박적으로 각 단락 분량을 정확히 같게 만든다. 이를 위해 각 단락의 글자 수를 강박적으로(!) 미세 조정할 때도 있다.

 

물론 이건 글 쓰는 사람 각자 스타일 소관이다. 다만 내 기준으론 한 단락 1~1.2매 정도가 쓰기도 읽기도 편하다. 단락이라는 ‘부분’과 글 한 편이라는 ‘전체’가 서로 응하며 돕는 글이 좋다. 그런 글이 ‘짜임새 좋은 글’이다.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글’이다. 한 조각 한 조각(문장)을 잘 결합해 부분을(단락) 만들고, 그 부분들을 다시 잘 연결 지어 만드는 레고 완구 비슷하다.

 

지금까지 이 코너에 내가 쓴 글들은 지금 이 글과 다른 한 편을 제외하면 9단락으로 이뤄져 있다. 지금 이 글은 아래 긴 인용 때문에 8단락이다. 다른 한 편도 10단락이니 모든 글의 한 단락 길이가 거의 같다. 내가 쓰는 글 대부분이 그러하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스타일, 그것도 다분히 강박적인 스타일이자 습관일 뿐이니 본받을 필요 없다.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치우는 독자라면 정신의 바벨탑에 듀이 십진분류법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미로 같이 복잡한 서가 사이를 걷고 있으면 아주 오래전에 읽은 방대하고 수없이 많은 책을 덮고 있는 티끌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토끼처럼 생각이 우리 앞으로 튀어나오는 법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에 내가 읽은 모든 책과 내가 품은 모든 생각을, 즉 나 자신의 전부를 쏟아부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내가 평생 흡수한 자료를 일일이 항목을 밝혀 완벽한 참고문헌을 작성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을 위해 일부러 찾아본 자료들도 있다. 나는 주로 일차적인 자료, 즉 내가 다루는 인물이 쓴 편지, 일기, 개인적인 글들을 참고하려 했다. 대부분 저작권이 소멸된 글들이다. 그리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전기와 이차 논문의 도움을 받았다. 후자의 저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jpg

 

 

원고지 2.3매 분량 한 단락이다. 내 기준으론 길지만 대단히 훌륭한 단락이자 글이며 또한 번역이다. 마리아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 (지여울 옮김, 다른)의 ‘참고문헌’ 부분. ‘강력 추천’하고픈 책이다. 요컨대 한 단락의 길고 짧음이 글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단락 길이에 집착하는 개인적 이유는 첫째, 한 부분에 힘을 싣기 보다는 글 전체의 균형감을 확보하고 싶기 때문이다.

 

둘째, 내 생각의 갈피를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 다른 작업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지만 글에서도 형식이 내용을 좌우하곤 한다. 단락 길이란 글의 양적 형식 측면이 될 터인데, 그 측면을 일부러라도 신경 씀으로써 나의 생각 그러니까 글의 내용을 좀 더 깔끔하고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나에게 단락 길이는 내 생각을 달아보고 재보는 저울이자 자라고 할 수 있겠다.

 

셋째, 내 글을 읽는 독자에 대한 배려, 일종의 서비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기나 개인적 비망록을 제외하면 사실상 모든 글은 독자를 전제로 한다. 더구나 글 쓰는 일이 직업인 작가라면 자신의 글을 돈을 주고 구매하는, 글 소비자로서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글 소비자들께서 내 글을 가급적 쉽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게 하려면?’ 단락 길이 강박증은 이 고민의 결과로 얻은 증상이기도 하다.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표정훈(출판 칼럼니스트)

출판 칼럼니스트, 번역가, 작가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쓴 책으로는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 『탐서주의자의 책』 등이 있다.

진리의 발견

<마리아 포포바> 저/<지여울> 역39,600원(10% + 5%)

앞서 나간 자들의 불멸의 정신을 만나다 “뛰어난 인물의 삶에 인간적 진실을 함께 엮어낸 인간 존재에 대한 이례적인 모자이크화가 탄생했다.” _[북트립] 『진리의 발견』은 1700년대부터 현재까지 네 세기에 걸쳐 역사적 인물들의 서로 교차하는 삶을 통해 복잡함과 다양성, 사랑이라는 감정의 모순, 진실..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ebook
진리의 발견

<마리아 포포바> 저/<지여울> 역30,800원(0% + 5%)

“지성에는 성별이 없다” 경계를 넘어 인식의 지평을 넓힌 여성들 “천재가 될 수 있는데, 누가 여편네가 된단 말인가?” _마거릿 풀러, 『19세기 여성』 “나는 탁월해지기로 했습니다.” 열다섯 살 때 마거릿 풀러는 편지에 썼다. 여성이 자신에게 주어진 천부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게 사실상 불가..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트럼프의 귀환, 위기인가? 기회인가?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거머쥔 트럼프. 글로벌 무역 질서를 뒤흔들 트럼프 2기 정부의 명암과 미국 우선주의 정책이 국제 정세에 미칠 영향에 대해 설명하는 박종훈 저자의 신간이다. 강경한 슈퍼 트럼프의 시대에 직면한 대한민국이 어떠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지 그 전략을 제시한다.

이래도 안 읽으실 건가요

텍스트 힙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독서가 우리 삶에 필요해서다. 일본 뇌과학계 권위자가 뇌과학으로 입증하는 독서 예찬론. 책을 읽으면 뇌가 깨어난다. 집중력이 높아지고 이해력이 상승하며 즐겁기까지 하다. 책의 장르는 상관 없다. 어떤 책이든 일단 읽으면 삶이 윤택해진다.

죽음을 부르는 저주받은 소설

출간 즉시 “새로운 대표작”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 관련 영상을 제작하려 하면 재앙을 몰고 다니는, 저주받은 소설 『밤이 끝나는 곳』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등장인물들이 함께 떠난 크루즈 여행 중 숨겨진 진실과 사라진 작가의 그림자가 서서히 밝혀진다.

우리 아이 영어 공부, 이렇게만 하세요!

영어교육 전문가이자 유튜브 <교집합 스튜디오> 멘토 권태형 소장의 첫 영어 자녀 교육서. 다년간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초등 영어 교육의 현실과 아이들의 다양한 학습 성향에 맞는 영어 학습법을 제시한다. 학부모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지침과 실천 방안을 담았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