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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희 칼럼] 번역가님, 몇 개 국어를 하시는 거예요?
<월간 채널예스> 2020년 5월호
일본, 중국, 프랑스, 스페인 등 영어권 외 국가의 영화는 누가 번역하는 걸까? (2020.05.11)
일본, 중국, 프랑스, 스페인 등 영어권 외 국가의 영화는 누가 번역하는 걸까?
미리 답하자면 대부분 영어 번역가가 번역한다. 해당 언어 대본을 보고 번역하는 게 아니라 영문 대본을 보고 번역하는데 이런 방식을 중역이라고 한다. 당연히 중역을 거친 번역은 직접 번역에 비해 오역 가능성이 크고 원문의 세세한 뉘앙스를 포착하지 못한다. 여건이 된다면 두말할 것 없이 직접 번역이 최고의 선택이다.
해당 언어 전문 번역가에게 맡기면 될 일을 왜 영어 번역가가 하는 걸까? 단순히 말하면 각 언어를 전문으로 하는 영화 번역가를 찾기가 어려워서다. 그나마 일어, 프랑스어는 경력 많고 인정받는 번역가들이 소수나마 있지만 중국어나 스페인어 등 나머지 언어들은 없다시피 하다. 내게 의뢰 오는 작품 중에 일어나 프랑스어는 내가 아는 실력자를 연결하기도 하는데 중국어나 스페인어 같은 것들은 소개할 사람이 아예 떠오르지도 않는다.
영상 번역 경력이 13년 차다 보니 케이블 TV 번역가(OTT 포함)부터 영화제 번역가, 극장 번역가까지 경력이 너무 짧은 사람을 빼면 대부분 알고 있다. 그중에서도 번역가들 사이에서 평이 높은 소수의 번역가 이름은 딱히 알아보지 않아도 귀에 들어오기 마련인데 그들 중에 영어 외 번역가의 이름이 들리는 경우는 정말 드물어서 13년간 한두 명뿐이었다. 매년 엄청난 수의 번역가가 데뷔하지만 영상 번역가 사회 내부에서 실력 좋단 소리 듣는 번역가는 많아야 2~3년에 한두 명, 그런 데다 영어 번역가에 비해 수도 터무니없이 적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수가 터무니없이 적은 이유는 다름 아닌 수입 때문이다. 영어권 외 영화들이 1년에 몇 편이나 개봉할까? 편 수가 가장 많은 일본, 중국 영화가 각각 열 편이 넘지 않는다. 애니메이션까지 포함한다면 조금 더 있을 수 있겠다. 한 명이 언어 하나를 독점한다고 가정했을 때 1년에 열 편을 번역한다는 건데 그 정도 수입으론 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려울뿐더러 그 얼마 없는 열 편을 혼자 독점할 수도 없다. 영어권 외 작품은 반 이상이 국내 영화제에서 상영하기 때문에 번역가에게 번역을 따로 의뢰하지 않는다. 영화제에서 자막을 제작하여 수입사에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애초에 영어 번역가가 아니라 모두 해당 언어 번역가에게 의뢰한다고 해도 잘해야 1년에 서너 편이다. 영어권 외 영화 중 편 수가 많다는 일어, 중국어가 이 정도니 다른 언어는 생각할 것도 없겠다. 이런 배경에서는 각 언어의 전문 영화 번역가들이 생존하기도, 경력을 쌓기도 어렵다. 그러니 개봉관 경력이 거의 없는 해당 언어 번역가의 번역본과 영어 번역가가 중역한 번역본을 비교하면 수준 차이가 날 수밖에. 건방지게 들릴지 몰라도 후자의 번역본이 낫다. 전자는 내용이 비교적 정확할지라도 결과물이 해석과 독해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영화사에서 납득할만한 번역본은 아니다. 그래서 영화사도 굳이 경력 많은 영어 번역가에게 의뢰하는 것이다.
경력 많고 실력도 좋은 해당 언어 번역가가 쓴 번역본이라면? 당연한 말이지만 중역한 번역본은 이미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몇 가지 떠올릴 만한 대안은 있지만 쉽진 않다. 우선 영어 번역가가 중역한 번역본을 해당 언어 전문가가 감수하는 방법. 지금으로선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막상 실현하기엔 문제가 많다. 감수자가 NDA(비밀 유지 각서)를 써야 하는데 엄밀히 따지면 수입사가 해외 스튜디오의 승인까지 받아야 한다. 그 과정이 쉽지도 않을뿐더러 수십억이 오가는 비즈니스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섣불리 맡기는 모험을 할 회사는 없다. 하물며 번역가 개인이 나서서 승인 없이 감수를 받는 건 미친 짓이다.
다음으로 영어 번역가가 각 언어를 기본적으로 해석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는 방법이 있겠다. 내가 고민 중인 지점도 여기다. 적어도 일어, 중국어, 프랑스어의 기본적인 해석 정도는 가능하게 공부해야 하는지. 영화 중간중간 나오는 영어 외 언어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직배사급의 큰 작품들을 제외하면 영어로 번역된 대본 자체가 대부분 형편없는 수준으로 온다.
최근 번역한 영화 <미드웨이>에서는 일어 대사를 잘못 번역했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일어를 영어로 번역해 놓은 부분에 오역이 넘쳐났다. 이렇게 감수를 받을 수도 없을 땐 내 외국어 실력이 아쉬워서 정말 따로 공부해야 하나 고민을 하루 이틀 하는 게 아니다.
여기부턴 중역에 불만이 큰 해당 언어 번역가 지망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반드시 영어 번역을 해야 한다. 전공 언어가 뭐건 꾸준히 영어 번역을 해야 영화 번역가로 생존할 수 있다. 영어 번역 물량이 수십 배이기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는 데도 한결 도움이 될 것이고 업계에서 인정받는 경력을 쌓으려면 영어권 작품 번역 말고는 딱히 답이 없다. 그렇다고 정체성을 영어 번역가로 바꾸라는 것은 아니다.
“누가 봐도 영어권 작품을 잘 번역하는 번역가이지만 일어(중국어, 프랑스어) 번역은 영어 번역보다 훨씬 잘하는 번역가”. 이 포지션에서 인정받아야 한다. 지금 시장에선 영어 외 특정 언어만 잘하는 번역가는 효용 가치도, 생존 확률도 현격히 낮다. 번역을 부업으로 할 거라면 상관없겠지만 - 사실 부업 번역가에게 누가 믿고 일을 맡기려고 할지 의문이지만 - 사랑하는 언어의 전업 영화 번역가로 남으려면 이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그런 번역가들이 하나둘 나온다면 중역 같은 건 없어져도 좋겠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YES24 채널예스
번역가이자 남편, 아빠이다 2005년부터 번역을 시작하여 주로 영화를 번역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보헤미안 랩소디>, <캐롤>, <데드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