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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언덕> 바람 불어 따뜻한 힘겨운 만남의 언덕에서

새롭게 만들어가는 모녀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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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르고 열악한데 그 위에 뿌려진 모녀의 만남이 새로운 관계의 씨앗으로 작용하여 풍성한 미래를 가꾸어나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촉촉하고 따뜻해진다. <바람의 언덕>은 그런 기대를 품게 하는 영화다. (2020.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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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람의 언덕>의 한 장면

  

 

눈이 쌓인 언덕을 오르는 여자의 얼굴에는 흡족한 기운이 달떠있다. 여러 번 올라와 본 솜씨다. 차가운 지반 위에서도 웃을 줄 아는 여자의 이름은 한희(장선)이다. ‘한없는 기쁨 限喜‘의 의미를 담은 이름답게 그 웃음이 눈 덮인 풍경을 녹일 듯도 하다. 한편으로 외롭게 혼자 있는 모습에서 눈으로 굳게 뭉쳐 얼어버린 마음속 외로움을 웃음으로 녹여 없애려는 것은 아닐까 마음을 쓰게 한다.  

 

한희에게 외로움을 안긴 장본인은 영분(정은경)이다. 영분은 한희가 태어나자마자 버렸다. 감당하기 힘들어서였다. 일부러 잊고 지내다가 한희의 연락처를 의도치 않게 손에 넣었다. 이제는 혼자만의 삶을 살겠다고,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돌아온 고향 태백에서 한희가 여전히 엄마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는다. 처음엔 애써 관심 없는 척, 하지만 끓으려야 끊을 수 없는 모녀의 연이라고 영분은 한희를 찾아간다.

 

한희는 필라테스 강사다. 회원 모집이 쉽지 않다. 밤늦은 시간 찾아온 영분의 방문이 반갑다. 영분은 딸 한희를 금방 알아보지만, 한희는 영분이 누구인지 모른다. 엄마 호칭 대신 회원님, 부르는 한희에게 영분은 선뜻 마음을 열지 못하지만, 몸을 맡긴다. 영분의 어깨 여기저기, 등 이곳저곳을 맥을 짚듯 살피는 한희의 손길에서 이 둘의 현재 관계를 읽을 수 있다.

 

강사와 회원의 관계에서 모녀 사이로 ‘교정’해야 하는 위치에서 주도적인 쪽은 한희다. 필라테스를 해서인지 건강하고 몸이 곧은 한희는 부모 없이 고아로 자라면서도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삶에 성실하게 임하면서 자기 앞가림을 하는 어른으로 올곧게 성장했다. 그와 다르게 영분은 한희를 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딸을 향한 부채감을 덜 목적으로 자기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남을 돌보는 삶으로 굴절된 시간을 보냈다.

 

한쪽 어깨가 올라가고 등뼈도 곧지 않다고 영분의 몸을 진단한 한희는 신경 써서 그에 맞춘 교정 운동법을 전수한다. 영분보다 한참 어린 나이지만, 엄혹한 바람이 부는 높은 언덕의 삶을 혼자 힘으로 올랐던 한희는 세상 살아가는 법을 아는 선생님 같다. 한희가 곁에서 자세하게 운동법을 알려줘도 영분은 따라하기가 쉽지 않다.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처럼 한희에게 자신이 엄마라고 알리는 게 망설여진다.

 

헤어진 부모와 자식 간의 극적인 조우를 다룬 작품에서 부모 찾기에 적극적인 자식과 자식의 애타는 부름에 좀체 응답하지 않는 부모의 구도는 꽤 익숙하다. <바람의 언덕> 이 새롭게 느껴진다면 낯설지 않은 설정 속에서 개별의 캐릭터는 전에 본 적 없는 반응을 보여서다. 홀로 된 세상 속에 웃음을 보호막 삼은 한희도 그렇고, 그 자신이 주인이 된 새로운 삶과 엄마임을 밝히고 사과해야 하는 상황 사이에 혼란을 느끼는 영분 캐릭터의 존재도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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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람의 언덕> 포스터

 

 

<바람의 언덕> 을 연출한 박석영 감독은 <들꽃>(2014) <스틸 플라워>(2015) <재꽃>(2016)으로 이어지는 ‘꽃 삼부작’에서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휘청거릴지언정 꺾이지 않는 소녀 캐릭터의 존재감으로 차가운 아스팔트 위의 삶에서 꽃을 피워냈다. 쌓인 눈 위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바람의 언덕>의 한희 캐릭터는 그 연장선에 있다. 차가운 아스팔트가 바람 부는 언덕으로, 꽃이 눈을 녹이는 온기로 바뀌었을 뿐.

 

영화의 시작과 결말의 배경이 조응하는 ‘바람의 언덕’에서 엄마와 딸은 나란히 앉아 세상을 바라본다. 영화의 처음과 다르게 그들이 자리 잡은 지반은 이제 눈이 녹아 척박한 맨땅 그대로 남아 있다. 메마르고 열악한데 그 위에 뿌려진 모녀의 만남이 새로운 관계의 씨앗으로 작용하여 풍성한 미래를 가꾸어나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촉촉하고 따뜻해진다. <바람의 언덕> 은 그런 기대를 품게 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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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허남웅(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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