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전고운의 부귀영화] 호르몬의 농단

전고운의 부귀영화 3화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스무 살 때 인 서울 대학의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 후 얼마 되지 않아 규칙적이던 생리 주기를 잃었다. (2020. 04.09)

호르몬의 농단_정방형.jpg

일러스트_ 이홍민

 

 

평생 해본 적 없던 생각이 들었다. 생리가 늦어지고 있는데, ‘설마 폐경인가!’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든 폐경 생각에 황당해져서 ‘에이 무슨 폐경이야’ 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30대 중반이면 그렇게 억측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산부인과 의사가 지친 얼굴로 “좀 이르지만 폐경입니다”라고 한다 해도 10초 정도만 놀랐다가 이내 수긍이 갈 것 같았다. 불규칙한 수면 패턴, 스트레스, 잦은 음주, 레토르트 식품 섭취 등 이유는 아무 곳에나 널려있는 삶이니까. 친구들에게 폐경 소식을 전한다 해도 “좀 이르네. 유감이다” 정도일 것 같다. 이런 찰나의 생각들로 순식간에 나이가 실감 났다.

 

나 중년인가.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올라가는 숫자의 변화가 아닌, 고민의 종류가 달라질 때 나이를 실감한다. 생리가 늦어지면 임신에 대한 공포로 떨던 내가 이제는 폐경의 공포를 마주하다니. 임신에 대한 공포가 청춘의 상징이 될 줄이야. 별 게 다 상징으로 남고 지랄이라니. 근데 지금 든 이 고민의 전환은 너무나 급진적인 거 아닌가. 분하다. 새들도 세상을 뜨고, 가장 큰 공포의 대상 뜨는구나. 뜬다고 생각하니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피 흘리던 나의 과거들이 떠오른다.

 

20살 때 인 서울 대학의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 후 얼마 되지 않아 규칙적이던 생리 주기를 잃었다. 그 나이에 산부인과 가는 건 공포 그 자체였다. 치과에 가면 입을 벌려야 되듯이 산부인과에 가면 다리를 벌려야 되는 게 당연함에도 여성이 다리 벌리는 동작 하나에 성적 대상화를 해두고 나에게 ‘여자는 다리를 오므려야 된다’고 주입시킨 사회에 대한 분노는 나 혼자만의 몫이었다. ‘다낭성난소증후군이라고 난소가 나만큼 게을러서 호르몬 주사를 맞고서야 겨우 생리를 했다가 치료차 피임약도 먹어봤다가 에라 모르겠다 그냥 포기하고 살다 보니 잊을만하면 알아서 찾아왔다.

 

그 후 평생을 불규칙한 생리로 얼마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가. 주먹만 한 자궁 하나 달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얼마나 불안하고 위태로운 삶을 살았던가. 생리로 인한 변화무쌍한 호르몬 변화로 겪는 폭력성과 무기력성을 조절하느라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썼고, 그에 대한 조절 실패로 인해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질렀던가. 그 많던 나의 난자들은 어디로 간 것이고, 남은 난자들은 얼마인가.

 

남은 난자들아, 자니?

 

허무하도다. 위험천만했지만 돌이켜보면 즐거웠던 것도 같다. 생리 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언제 배가 아파서 방을 기어 봤을 것이며, 공포에 떨며 네가 나타나게 해달라고 믿지도 않던 신에게 두 손 모아 빌어 봤을까. 꼭 중요한 날만 귀신같이 골라서 나와 곤혹스러웠던 것은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고, 그때마다 널 대응하느라 나의 대처 능력과 위장술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네가 딱히 고맙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직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들 다 하는 것 중에 하는 게 어쩌면 너뿐 일지도 모르니까 지금 너마저 없어진다면 서운할 것 같다. 나는 요즘 서운한 것에 몹시 지쳐 있으니 너만은 그러지 말자.

 

다행히 며칠 후인 오늘 생리가 터졌다. 아, 다시 난 평범한 티켓을 한 장 들고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하루 종일 방바닥을 기어 다녔지만. 불과 며칠 전 저런 생각들로 생리를 의인화하며 저런 호소를 했다니. 이건 필시 호르몬의 농단 냄새가 난다. 보이지는 않지만 지독한 미세먼지랑 꼭 닮은 모양새다. 이런 극악한 호로몬의 지배 아래에 살고 있는 동지들이 떠오르며 며칠 전 남편과 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남편은 출퇴근이라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일인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매일 시간에 맞춰 출퇴근을 하고 있어서 다 우울증에 걸리는 거라고. 자기였으면 매일 아침 울었을 거라고. 그 말에 정말 크게 동의를 하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생리를 하나 에스트로겐이 흐르나 프로게스테론이 흐르나 매일 억지 눈을 떠서 출근을 하는 동료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존경을 보낸다. 생리가 나와도 문제 안 나와도 문제, 결혼 전에는 임신 금지였다가 결혼하는 순간 출산을 강요하는 이 나라에서 나는 영원히 비적응자일 것 같지만.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YES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4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전고운(영화감독)

영화 <소공녀>, <페르소나> 등을 만들었다.

오늘의 책

당신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존감 열풍 시대에 '가짜 자존감'을 화두로 던지며 베스트셀러에 오른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전미경 작가의 신간이다. 습관적으로 자책하고 후회하며 과도한 생각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나쁜 심리 습관을 끊고 주도적인 삶을 갖는 마음의 기술을 전한다.

김진애의 유쾌한 여행론

깊은 통찰을 유쾌한 입담으로 풀어내는 도시 건축가 김진애의 여행 에세이. 인생은 여행이다. 여행은 모험이고 관계다. 나만의 특별하면서도 의미 있는 여행을 원하는가? 여행을 좋아하고 즐기지만, 돌아온 뒤에 헛헛해지는가? 그렇다면 김진애의 여행론이 도움을 줄 것이다.

손보미가 그리는 소녀들의 일인칭 세계

손보미 소설가의 5 년 만의 신작 소설집. 손보미식 절제된 묘사와 서술로 뜨거운 내면의 십 대 소녀들과 날 것의 세계가 만들어 낸 충돌을 풀어냈다. 「불장난」처럼 울렁이는 십 대 시절의 감정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이 소녀들이 만들어 내는 에너지에 금방 휩쓸릴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속에 감추어진 이야기

십 대들의 세계를 흔드는 작가 이꽃님의 신작이 나왔다. 이번 소설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웃음과 희망, 기쁨은 없다. 좋아하는 마음 이면에 숨겨진 어두운 그것, 청소년들의 관계 맺기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날것 그대로 끄집어낸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나를 바꾸는' 건 사랑일까, 괜찮은 걸까?

.

주목! 투데이 포커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