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디자인 특집] 이기준, 디자인은 레고처럼
<월간 채널예스> 2020년 4월호
대학 때부터 오직 편집 디자인에 관심이 있었다. 졸업 작품도 당시 재미있게 읽은 책을 다시 디자인한 것이었고 그 계기로 출판사에서 일하게 됐는데 작업 영역이 책에 한정되어 다른 일은 못 하는 디자이너가 될까 봐 1년만에 그만두고 그래픽 디자인 회사를 세 군데 다녔다. (2020.04.13)
멀리서 보면 섬세하고, 꼼꼼하고, 깐깐한 이미지의 디자이너 이기준은 가까이서 보면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조금은 느리지만 차곡차곡 자기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는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이다. 관찰자 시점에서 살펴본, 그가 디자인한 책들은 멀리서 본 디자이너와 가까이서 본 디자이너의 성정이 고스란히 박혀 있는 느낌이다. 간결한 여백의 여유 사이사이에 독자를 섬세하게 배려한 재미 요소가 고명처럼 뿌려져 있다. 흥미로운 건, 그 많은 고명에 흔한 클리셰 하나 없다는 점이다.
북 디자이너 이기준의 시작이 궁금하다.
대학 때부터 오직 편집 디자인에 관심이 있었다. 졸업 작품도 당시 재미있게 읽은 책을 다시 디자인한 것이었고 그 계기로 출판사에서 일하게 됐는데 작업 영역이 책에 한정되어 다른 일은 못 하는 디자이너가 될까 봐 1년만에 그만두고 그래픽 디자인 회사를 세 군데 다녔다. 몇 년 후 프리랜서로 전향하면서 책 디자인을 몇 권 맡았는데 그게 지금까지 이어졌다. 짧은 기간에 일찍 두각을 나타내는 디자이너가 있는 반면 난 눈치 없고 모든 면에서 느린 편이다. 다행인 점은 느릴지언정 계속 배운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
북 디자인과 책은 어떤 영향 관계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나?
몸에 좋은 음식이라도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으면 맛이 덜할 것이다. 적절한 디자인은 몸에 좋으니까 억지로 먹는 게 아니라 건강한 음식을 즐겁게 먹을 수 있게 한다. 한편 못생긴 표지는 안 보거나 포장지로 덧씌우면 그만이지만 본문 타이포그래피가 엉망이면 읽는 행위 자체가 짜증으로 느껴질 수 있다. 디자인이 책의 본질을 바꿀 순 없지만 독서 경험을 쾌적하게 할 순 있다. 책뿐 아니라 어떤 물건이든 좋은 디자인을 자주 접하는 사람은 보통 그냥 지나치곤 하는 일상의 작은 부분에서 자신만의 뭔가를 발견하리라 확신한다.
굉장히 꼼꼼해 보이는 인상이다. 작업한 책들 역시 일관되게 섬세한 디테일이 느껴지는데, 이기준 디자인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 특징을 굳이 말한다면, 어딘가 어수룩하면서 경쾌한?(웃음) 난 미감이 날카롭지 않다. 소위 말하는 4차원에 가까운 감각인 것 같다. 4차원스러운 작업은 클라이언트가 받아들일 확률이 낮다. 그런데 나는 클라이언트의 의견을 웬만하면 받아들이는 성향이면서 자아가 강하다. 두 봉우리를 끊임없이 오가며 계곡에서 헤매는 동안 어정쩡한 미감이 형성된 것 같다. 시류에 관심이 없어 늘 자신의 호기심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성격도 거들었을 것이다. 외따로 떨어져나가 오랜 기간 교류가 없던 덕에 다른 대륙과 구별되는 생태계가 유지되었다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보며 용기를 얻는다.
글 자아와 그래픽 자아가 펼치는 컬래버레이션이야말로 관전 포인트다.
디자이너 이기준을 말해주는 단 한 권의 책을 꼽는다면?
『저, 죄송한데요』 . 직접 쓰고 디자인한 책이다. 글을 쓸 땐 그래픽 할 때와 다른 자아가 등장하는데 그 캐릭터가 흥미롭다. 더 발굴하고 싶다. 『저, 죄송한데요』 를 통해 손발이 맞는 걸 알았으니 다음 프로젝트도 성사시키고 싶다.
자신이 디자인한 책 중 가장 좋아하는 세 권을 꼽는다면?
가장 좋아한다기보다 의미가 있는 세 가지를 꼽고 싶다. 일단 『쾌락 도구 사전』. 쏜살문고 역시 사랑하는 시리즈다. 그리고 『몬스터』. 내게 기꺼운 방식으로 작업하면 유유 책 같다는 소리를 들어서 고민이다. 한 출판사의 책을 100권 넘게 작업한 결과일 텐데, 당연하면서도 무섭다. 유유 아닌 다른 출판사의 책을 작업할 땐 의도적으로 다른 언어를 구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때마침 맡은 소설집 『몬스터』가 타이밍이 좋았다. 앞으로 탐색할 방향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쾌락 도구 사전』2는 내용을 장악했다는 생각이 든 첫 책이다. 요소 대부분이 착착 맞아떨어져 기분이 좋았다.
북 디자이너 이기준의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저자의 목소리를 가늠하려고 노력한다. 새 원고가 들어오면 자신을 백지화한다. 영향을 최대한 줄이려 해도 나는 나일 뿐이라 어쩔 수 없이 나다운 요소가 깃들겠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디자이너의 자아가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게 없다면 뭐하러 그 사람한테 디자인을 맡기겠나? 선문답 같아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생각은 그렇다.
북 디자인 작업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취하는 요소와 아예 배제하는 요소가 있다면?
고정해둔 의도는 없다. 책에 담기는 내용의 스펙트럼은 넓지만 매체로서는 꽤 보수적인 것 같다. 고착된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기 힘들지만 클리셰는 피하려고 하는 편이다.
작업이 가장 즐거웠던 책도 궁금하다.
『셰어 미 Share Me』 . 알파벳과 숫자는 마음에 드는데 쉼표와 따옴표의 꼬리가 보일 듯 말 듯해 고민하다 구두점만 다른 폰트를 섞어 썼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는지. 폰트를 더 뒤섞는 방식을 탐색할 요량이다.
쏜살 시리즈를 작업하면서 표면에 아주 얇게, 살짝 입힌 듯 가벼운 그래픽을 만드는 감을 잡은 것 같다.
디자이너 이기준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대상은 누구인가?
어린 시절 절친이던 레고다. 몇 가지 모듈을 조합해 온갖 것을 만들던 감각과 지금의 작업 방식이 다르지 않다. 아무리 써먹어도 지겹지 않다.
요즘 북 디자인 신에서 관심 가는 동료가 있다면?
몇 년 전, 돌베개 책의 느낌이 확 달라져서 드물게 표지를 펼쳐 이름을 봤더니 김동신 디자이너였다. 마티의 책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데 오새날 디자이너의 솜씨라는 걸 알았다. 홍성사의 책은 기독교 울타리 안에 있어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김진성 디자이너 덕분에 새로 바라보게 됐다. 근래엔 유어마인드, 키오스크키오스크 등에서 발견한 멋진 작업들에서 양민영, 오혜진, 이예주, 전용완 등의 이름을 건졌다. 민음사 디자인팀 역시 늘 기대된다.
일상에 깃든 여러 형태의 괴물을 암시하는 방법으로 평범한 동네 사진의 채도를 극단적으로 높이고
그 위에 그래픽을 박 처리했다. 앞으로 탐색할 방향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2020년 3월, 최고 관심사가 있다면?
거의 매일 온라인으로 옷을 구경한다. 특히 일본 브랜드를 유심히 본다. 아시아인의 체형에 맞게 미묘하게 달라지는 비례. 특정 직업군을 위해 고안된 장치를 도시 생활에 맞게 응용하는 방식, 기능성 소재를 일상생활에 적용하려는 노력 등 흥미로운 요소가 많다. 집요하게 디테일을 매만진 결과물을 보면 기분이 좋다. 그 연장선은 아니지만, 누군가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작업이 무엇인가 물으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옷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한다.
저, 죄송한데요
이기준 저 | 민음사
우리 이웃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친근성, 그리고 주변에 없다면 주변에 두고 싶은 친근성이 새삼 매력으로 다가오는, 에세이의 정통적인 미덕을 잘 보여 주는 산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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