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폼 특집] 틱톡 시대의 사랑
<월간 채널예스> 2020년 3월호
‘읽는’ 콘텐츠도 활자라는 고전적 자태 아래로 부지런히 발길질을 하며 ‘숏-폼’ 시대에 살아남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2020.03.09)
언스플래쉬
올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아이티(IT)ㆍ가전 전시회 CES에서는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업계와 방송ㆍ통신 사업자가 주목하는 플랫폼 서비스가 공개됐다. 공식 론칭도 하기 전 10억 달러의 투자금을 모아 순식간에 유니콘으로 등극한 ‘퀴비(Quibi)’가 베일을 벗은 것. 할리우드 유력 제작자 제프리 캐천버그가 주도해 오는 4월 서비스를 시작하는 동영상 스트리밍 ‘퀴비’는 스마트폰에 최적화된 10분 안팎의 숏-폼(short-form) 콘텐츠만 제공하는 플랫폼이다. 참여에 응한 창작자도 스티븐 스필버그, 기예르모 델 토로, 샘 레이미 등 어마어마하다. 어두운 극장에서 두 시간을 온전히 바쳐야 자신의 예술 세계를 드러낼 것만 같던 감독들마저 퇴근길 흔들리는 버스에서 한 입 거리(Quick Bite, 퀴비의 뜻)가 될 즐거움을 제공하기로 작정하고 나선 것이다.
‘숏-폼이 대세다’라는 말은 이제 ‘지구는 둥글다’라는 말만큼이나 당연한 사실이 됐다. 아침에 일어나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고 친구들 안부를 확인하며 업무 체크를 하고 쇼핑하는 틈틈이 음악과 동영상까지 즐기다 잠드는 일상을 비집고 들어갈 콘텐츠는 장르 불문하고 ‘숏-폼’이 아니고서는 살아남기 힘들어졌다. 불과 10년도 안 되는 시간에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기처럼 자리 잡은 숏-폼 콘텐츠는 이제 단순히 숏-폼 또는 유튜브라는 말로 묶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다.
퀴비의 성공 예약에 단 하나, 의심의 단초를 제공하는 게 ‘틱톡’의 위세다. ‘10분도 길다, 15초면 충분하다’는 이 울트라 숏-폼 동영상 플랫폼은 2018년 하반기부터 전 세계인이 가장 많이 내려받는 앱으로 성장했다. 틱톡 월드에서는 <겨울왕국 2>도 <기생충>도 1분 안에 끝난다. 최근 틱톡은 뮤지션 지코의 ‘아무노래’ 틱톡 챌린지를 통해 가장 핫한 소셜미디어로 부상하면서 대중문화 콘텐츠의 가장 치열한 마케팅장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태생이 동영상인 ‘숏-폼’과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신문이나 잡지, 단행본 같은 활자매체 또는 문학, 인문학 같은 ‘읽는’ 콘텐츠도 활자라는 고전적 자태 아래로 부지런히 발길질을 하며 ‘숏-폼’ 시대에 살아남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문학 스타트업 스튜디오봄봄이 2017년 10월 서비스를 시작한 초단편 소설 및 웹소설 플랫폼 ‘판다플립’(pandaflip.com)이 한 예다. 김연수, 성석제, 장강명, 최은영 등 쟁쟁한 작가가 사이트 오픈 때 2000자 내외의 짧은 소설을 기고해 주목받은 이 사이트는 숏-폼 시대의 ‘3분 독서’를 위한 문학 콘텐츠를 제공한다.
웹소설 사이트나 ‘밀리의 서재’ 같은 구독형 독서앱 등이 모바일에 맞춘 책의 디지털 전략을 보여준다면 종이라는 책의 물성을 포기하지 않는 전통적 출판산업도 ‘숏-폼’ 시대와 함께 호흡한다. 오래전 학생들과 청년들의 가방 속에 기본 사양으로 머물다 슬그머니 사라졌던 문고판의 현대적 해석인 민음사의 ‘쏜살문고’가 대표적이다. 2016년 첫 권을 내기 시작해 지난해 50권을 돌파하면서 ‘신’문고판 바람을 일으킨 쏜살문고는 미니백에도 들어갈 만한 크기에 200쪽을 넘지 않는 두께, 각 권마다 공들인 감각적 디자인의 표지 안에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담았다. 문학과 인문학을 하나의 시리즈로 묶은 건 이전의 ‘전집류’와 달리 ‘큐레이션’ 기능이 출간 목록을 쌓는 데 주요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민음사는 올 초 ‘책보다 짧고 논문보다 쉬운’ 인문 잡지 『한편』 을 창간해 일주일 만에 3000부 초판을 모두 팔았다. 바쁘고 콘텐츠는 쏟아지며 책 볼 시간은 없어지는 세상과 그럼에도 여전히 죽지 않는 인문학적 욕구에 대한 갈증 사이의 난도 높은 줄타기에 성공한 것이다. 서효인 민음사 한국문학 팀장은 “두꺼운 책에 집중할 환경은 점점 안 되는데 출판사 입장에서 독자들이 긴 글을 못 읽는다고 탓할 게 아니라 독자들이 몰입해 읽게 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며 “책의 몸피를 가볍게 하는 숏-폼 역시 그런 고민에서 나온 것으로 비단 책의 외형이 아니라 콘텐츠와 플랫폼 등 책의 안과 밖을 아우르는 다각적인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쏜살문고’가 경쾌한 외피에 진중한 고전을 담았다면 코난북스, 위고, 제철소 등 3인의 1인 출판사 대표가 의기투합해 만든 ‘아무튼’ 시리즈는 형식과 내용에서 ‘숏-폼’시대와 좀 더 적극적으로 조우하는 에세이다. 저자 개인의 취미나 좋아하는 걸 장르 불문, 이유 불문하고 엮은 이 시리즈에는 딱따구리, 양말 등 도대체 이걸 어떻게 썼을까 싶은 주제들이 빼곡하다. 광범위한 독자를 의식하기보다 개인적 취향이 강한 숏-폼 콘텐츠의 흐름과도 맞아떨어지는 기획이다. 이 기획을 제안한 이정규 코난북스 대표는 “책 한 권을 몇 시간 내리읽기 어려울 만큼 바쁘고 다른 미디어에 시선을 빼앗기기 좋은 환경에서 편하게 들고 다니다 틈틈이 읽어도 무방한 짧은 글들, 여행 중간중간 짬짬이 읽는 모습을 떠올리며 시리즈를 추진하게 됐다”고 기획 취지를 밝혔다.
민음사 계열사인 세미콜론은 개인의 취향 가운데 아예 ‘음식’에만 집중해 3월부터 해장 음식, 조식 등을 주제로 짧은 에세이 시리즈 ‘띵푸드’를 시작한다. 『아무튼, 스릴러』 를 썼고 ‘띵푸드’ 시리즈에도 참여하는 이다혜 작가는 출판계의 숏-폼 트렌드가 빠르게 변하는 사람들의 관심사를 반영하기 위한 자구책의 측면도 있다고 본다. 이 작가는 “출판 기획의 리듬이 1~2년, 그 이상을 내다보고 긴 호흡을 가지던 시대와 달리 지금은 기획부터 출간까지 1년을 넘기지 않아야 당대의 관심사를 따라갈 수 있다”면서 “전통적인 800~900매 분량이 아닌 300~500매 분량으로 빠르게 두껍지 않은 책 한 권이 완성되고 그만큼 가격도 낮아지는 것까지 변하는 독자들의 요구와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짚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출판계는 ‘숏-폼’ 시대에 ‘숏텀’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영상 미디어의 상당 부분은 이미 ‘숏-폼’ 콘텐츠가 지닌 휘발성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활자의 영속성과 책이 지닌 물성의 무게감은 휘발될 수 없기 때문에 자칫 트렌드로서의 숏-폼이 독이 될 수 있다는 염려다. ‘아무튼’ 시리즈를 기획한 이정규 대표는 “시리즈가 쌓이면서 주제의 신선도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면서 “취향의 세계를 다룬 시리즈들이 속속 등장하다 보니 고만고만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된다. 숏-폼을 단순히 짧은 형식이라기보다 밀도 높은 콘텐츠로 접근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숏-폼 출판물을 기획한 한 프리랜스 기획자는 “숏-폼이 기획에서 출간까지 빠른 만큼 책의 수명도 짧아지는 경향이 있다”면서 “두껍고, 비싸고, 머리 아픈 옛날이야기는 안 산다”는 대중 독자들의 변하는 관심사를 어디까지 따라갈 것인가에 대한 출판계의 고민이 더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한편 1호 세대편집부 편 | 민음사
끊임없이 이미지가 흐르는 시대에도, 생각은 한편의 글에서 시작되고 한편의 글로 매듭지어진다. 2020년 새해 창간하는 인문잡지 『한편』은 글 한편 한편을 엮어서 의미를 생산한다. ‘책보다 짧고 논문보다 쉬운’ 한편을 통해, 지금 이곳의 문제를 풀어 나가는 기쁨을 저자와 독자가 함께 나누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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