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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탕과 온탕 사이

엄마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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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보며 어렴풋이 배웠던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을 식히며 살아가겠다고.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2020.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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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플래쉬

 


엄마는 전생에 멧돼지였을지도 몰라.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엄마는 멧돼지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는 습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무언가에 꽂혔다 싶으면 바로 행동에 들어간다. 아빠를 사랑하는 일이 그러했고, 다친 마음을 보살피기 위해 여러 종교를 거친 시기가 그러했다. 좋게 말하면 주저 없이 노력하는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없다. 한 마디로, 늘 끓고 있다.
 
반대로 나는 대체로 식어 있다. 달리기 전에 이 길이 맞는지, 더 효율적인 길은 없는지 이리저리 둘러보고 두드려 보아야만 출발할 수 있다. 누구와 함께 뛰는지, 이 관계는 경쟁인지 협력 관계인지도 중요하다. 경쟁이라면 슬그머니 발을 빼려 하고, 협력이라면 어디까지 힘을 모아야 좋을지 마음의 선을 그려본다. 좋게 말하면 합리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겁이 많고 일이 느리다.

 

엄마가 온탕이라면 나는 냉탕이라고나 할까. 엄마는 특히 인간관계에서 굉장히 뜨거운 사람이다. 온 마음 쏟아 누군가를 사랑하고, 의지하고, 믿는다. 그리고 (당연히도) 상처받는다. 서로가 다르다는 점에, 이해할 수 없음에, 이해받을 수 없음에. 그러면서도 또 사랑받고 또 사랑하기 위하여 엄마 나름대로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점이 (내가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대환장파티인데, 어릴 때부터 그런 엄마를 보며 어렴풋이 배웠던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을 식히며 살아가겠다고.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친구의 모험적이고 화려했던(?) 연애사를 들을 때였다. 나도 한 번쯤 눈이 헤까닥 뒤집히는 사랑을 해보고 싶다가도 하고 싶지 않아진다고 말했더니 친구가 물었다. “그럼 너는 정말 마음에 들고 완전히 네 스타일인 사람을 보면 어떨 것 같아?” 답을 들은 친구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답은 이거였다. “그냥 지나가는 인연 정도로 남을 수 있게 적당히 거리 두고 피할 것 같아.” 불이 붙는 건 노 땡큐. 끓어오르면 그만큼 식기 마련이라는 진리는 질리도록 봐왔더랬다.

 

연애는 ‘자, 이제부터 시작합시다’ 해서 한다기보다 대책 없이 상대에게 푹 빠지는 거잖아. 그러면 이게 좋은 연애인지 나쁜 연애인지, 내가 이득을 볼지 손해를 볼지 애초에 가늠할 수가 없어. 사랑은 그냥 빠져버리는 것이니까. 행여 나에게 유리하거나 유익한, 절대 상처 줄 일이 없는, 그런 ‘좋은 연애’를 구하고 있는 사람에겐 ‘사랑에 푹 빠져버리는 사고’는 아마도 일어나지 않을 거다. 물론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게 되는 것 자체를 위험요소(리스크)로 바라본다면 뭐 그렇게 ‘안전하게’ 살면 되는 거고.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중에서
 
푹 빠지는 사랑이란 뭘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푹 빠지다 못해 적셔진 사랑을 해본 엄마는 내게 그런 사랑은 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엄마, 내가 냉정한 까닭은 열정이 싫어서가 아니야. 두려워서지. 비참해지는 것이 싫은 게 아니라 사실은 치열할 자신이 없는 거지. 사람이든 세상이든 치열하게 믿을 자신이.

 

냉탕과 온탕이 만났을 때, 물처럼 섞여 그저 미지근해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실제로 함께 있는 시간을 보면 물보다는 공기에 가까운 것 같다. 함께 있은 지 48시간이 지나면 서로가 피곤해지는 걸 보면.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기단과 한랭습윤한 오호츠크해 기단이 만나 장마전선을 이룬다던데, 딱 그 모양이다. 그래도 조금 다짐하게 되는 것이 있다면, 내가 가질 수 없는 엄마의 뜨거움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 차가우면 안전하기는 하지만 나 혼자 안전한 건 의미 없으니까. 그렇게 엄마에게 배운 믿음을 다시 엄마에게 대리하며 온탕에 발을 담가 본다.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요조, 임경선 저 | 문학동네
어린 시절 다른 이들이 침범할 수 없는 우정을 나누던 단짝소녀들이 그랬듯이 ‘교환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완연한 어른 여성이 되어 여자로 살아가며 보고 느끼고 경험한 모든 것에 대해 낱낱이 기록한 교환일기를 주고받은 두 여자, 바로 요조와 임경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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