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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의 모두 함께 읽는 책] 노란 선 위의 익명 공동체를 위하여

<월간 채널예스> 2020년 2월호 이명애 그림책 『내일은 맑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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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애 작가의 그림책 『내일은 맑겠습니다』에는 무려 천 명에 이르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표지에서 몸보다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맨 채 노란 선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시작이다. (2020. 0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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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_ 이명애

 

 

아침에 일어나 저녁까지 도시의 거리를 걷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과 마주칠까. 출근길의 어마어마한 인파를 생각하면 헤아리는 일이 어리석다고 하겠지만 나와 어깨를 스치는 그 사람은 어딘가에서 와서 무언가를 하러 움직이는, 남과 다른 특별한 사람이다. “오늘도 사람들이 너무 많아.”라고 뭉뚱그리기에는 그 한 사람이 오늘 벌이게 될 분투가 너무나 간절하다. 물론 우리는 그가 누군지 모르고 그도 우리를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안다. 그 많은 이들이 고단하고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나와 오늘을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는 내일이 오늘보다는 맑기를 바라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명애 작가의 그림책 『내일은 맑겠습니다』 에는 무려 천 명에 이르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표지에서 몸보다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맨 채 노란 선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시작이다. 이어서 노란 선을 따라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서로 다 다르다. 입은 옷, 생김새, 하는 일, 나이, 놓여있는 조건이나 상황까지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누구는 휠체어를 밀면서, 누구는 미세먼지 마스크를 쓰고서 아침의 거리로 나선다. 이렇게 낯선 서로를 하나로 연결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림에서는 끝없이 이어지는 노란 선, 글에서는 라디오 모양의 기호와 함께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주간 일기예보다.


멈추지 않고 질주하는 노란 선은 버스정류장에도 있고 횡단보도에도 있으며 오늘도 어김없이 넘어야 하는 인생의 정글짐에도, 무한 경쟁의 사각 링에도, 예상치 못한 풍파의 계단에도 있다. 이 책의 그림 텍스트에서 노랑은 금지와 환대와 열정과 보호의 의미를 모두 담은 풍부한 상징으로 작용한다. 더불어 또박또박 들려오는 주간 일기예보의 글 텍스트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팔과 다리, 굽은 등, 잔뜩 움츠린 어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할 말만을 정확하게 읊는다. 날씨를 알려주는 일 외에는 아무 것에도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 얼핏 냉정하게 느껴진다. 이 문장들은 그림이 쉬지 않고 전하는 온기, 비통, 환희, 분노, 감격, 애환에 흔들리지 않고 갈 길을 간다. 글로 쓰인 또 다른 의미의 노란 선으로도 볼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이 많은 책 속 인물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들여다보게 만드는, 섬세하게 펄떡이는 그림이다. 이 작품 속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이름이나 지위를 드러내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는 거의 대부분이 날마다 이렇게 이름 없는 사람으로 산다. 그들의 목소리와, 분명히 존재할 비명과 울음과, 가끔 들려올 지도 모르는 탄성이나 안도의 한숨은 완전히 무음으로 처리되어 있다.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소리의 권력이 주어지지 않는다. 동의한 적 없는 음소거가 일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그림책을 읽어가면서 점점 그들의 이름을 알겠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그 무음 무기명의 주인공 중에는 사라지는 밀림의 불곰도 있고 남극 바닷가의 물개도 있다. 노란선의 익명 공동체다. “왜 이들이 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느냐?”와 같은 말은 한 줄도 없이 이명애 작가는 그 마법 같은 일을 해낸다.


책장을 넘기고 있으면 역동적인 그림과 담백한 글 사이에서 교감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반짝 추위에 맞서 조심스레 총총 걷던 사람들은 “화요일부터는 기온이 소폭 상승하면서”라는 멘트가 흘러나올 때쯤 노란 선을 붙잡고 몸을 삶에 힘껏 걸기 시작한다. 이들의 에너지로 기온이 소폭 상승한 것인가 싶은 대목이다. 수요일의 비 소식은 노동에 지쳐 바싹 마른 몸을 적셔주듯이 노란 물결이 출렁이는 수영장 장면으로 넘어간다. 이쯤 되면 독자는 한 주의 중간을 차지한 목요일의 소강상태는 또 어떤 반전으로 이어질까 기대하면서 금요일을 맞이하게 된다.


어느덧 우리를 하지 못하게 하는 노란 선은 무언가 할 수 있게 하는 노랑이 되어 절정의 단풍처럼 눈부시게 빛난다. 흩어져 살지만 우리는 하나의 탄탄한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든든함은 덤이다. 그리고 이 책의 뛰어난 마지막 문장은, 본문이 아니라 책을 덮으면서 앞표지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제목이다. 최고의 문장 “내일은 맑겠습니다.”는 작가의 현명한 주술처럼 독자의 기억에 남는다. 이명애 작가는 그림과 글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뛰어넘는 중층적 의미를 한 권의 책에서 보여준다. 오늘의 현실을 과장 없이 증언하면서도 청량한 내일을 포기하지 않고 내 손의 노란 밧줄을 다시 꽉 쥐게 만드는 그림책이다.   


 

 

내일은 맑겠습니다이명애 글그림 | 문학동네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넘나들면서도 조화로운 이명애의 드로잉. 천 명에 육박하는 인물을 그리는 데만도 긴 시간이 걸렸다. 아이와 어른, 근처와 먼 곳, 일상과 예술, 인간과 비인간을 넘나드는 등장인물들의 발소리는 시원한 판면을 팽팽하게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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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은(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어린이, 세 번째 사람』, 『거짓말하는 어른』을 썼고 『왕자와 드레스메이커』, 『인어를 믿나요』, 『홀라홀라 추추추』 등을 옮겼다.

내일은 맑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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