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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83화 : 우리는 일제 경찰이 아니다
『마터 2-10』 연재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최달영은 조심스럽게 영등포 경찰서로 출근했다. 포고령에 의하면 모든 직업인이 직장으로 돌아가 평소의 직무를 수행하라고 되어 있었다. (2020. 02. 03)
<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마쓰다는 손가락을 위로 세우면서 말했다.
“저쪽에 들어오는 건 공산주의 소련 아닌가. 여긴 자본주의 미국이 들어온다. 미군은 자네 같은 유능한 사람을 원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잘했으니 그들도 자기네에게 잘해줄 사람을 찾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더구나 자넨 공산주의자 때려잡는 기술자란 말이지.”
최달영은 눈앞이 번쩍할 정도로 어떤 깨달음이 지나가는 걸 느꼈다. 마쓰다가 계속해서 말했다.
“자네만 그런 게 아니야. 오늘 오후에 보니까 조선인 보조 순사들 모두 전원이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더군. 아마 우리도 휴직을 하게 될 모양인데 아마 열흘이 못갈 거다. 미군이 들어오면 그때부터 치안은 다시 회복이 될 테니까.”
“그러면 저도 오랜만에 휴가를 좀 가겠습니다. 미점령군이 오면 그때쯤 다시 뵙겠습니다.”
“음 그러지. 그때는 꼭 서에 출근하게. 무장두 챙기구 다니게.”
최달영은 무엇인가 큰 깨달음을 얻고 기운이 나서 안양 처갓집으로 가는 경부선 완행열차를 탔다.
건준의 보안대나 학병동맹의 청년들이 서울의 각 경찰서를 점거하면서 일경과 마찰을 빚었다. 과거의 원한으로 조선인 경찰들을 살해하거나 폭행한 경우가 수십 건 발생했지만 사태는 곧 잦아들었다. 이에 비하면 소련군 점령하의 북한은 일본 경찰과 헌병은 물론 검사나 판사의 과거 이력을 조사하고 조선인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라 재판정에 세워 사법적 처벌을 했다. 따라서 수많은 조선인 출신 경찰과 관리가 이남으로 도망쳐 내려왔다. 예상했던 대로 9월초에는 서울의 경찰서마다 뒤숭숭하던 치안 불안 현상이 사라졌다. 서울 시내를 일군이 지키기 시작했고 일제 경찰 간부들은 조선인 경찰 간부들에게 직임을 승계해 주고 있었다.
최달영은 안양 처가에 푹 박혀서 세월을 보냈다. 겉으로는 무사태평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속내는 불안하고 암담하기만 했다. 그는 자기가 확보한 경부보라는 일제 경찰 계급이 수많은 조선인들의 직업 가운데서 흔치 않은 위치임을 알고는 있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최달영은 조심스럽게 영등포 경찰서로 출근했다. 포고령에 의하면 모든 직업인이 직장으로 돌아가 평소의 직무를 수행하라고 되어 있었다. 경찰은 누구보다도 먼저 직무 수행에 나서야 할 것이다. 마쓰다 부장은 최달영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오이! 하면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자 마쓰다는 반갑게 말했다.
“자네의 출근을 기다렸네. 우리 일본 측 경찰관은 모두 해임 조치되었네. 그리고 조선인 서장이 부임하게 될 걸세. 자네는 용산서로 발령이 났다네.”
마쓰다는 공문을 최달영에게 내밀어 주었다.
“여기서 잔뼈가 굵었지만 아무래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겠나. 아마도 미군정 경무부에서는 그런 점들을 참조한 것 같네.”
서울 시내 10개 경찰서장과 경기도내 21개 경찰서의 서장들이 미군정 당국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이들은 모두가 일제의 경찰과 관리의 경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최달영은 발령 받은 용산서로 출두했다. 조선인 신임서장은 역시 이전에 일제 경찰 경시였고 정식으로 순사 시험을 치르고 간부직에 오른 사람이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고위직에 오르려면 조선인 독립 운동가들을 많이 투옥 고문 체포해야 되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이력이 적힌 서류를 들고 잠시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바로 직속상관이던 마쓰다 경부는 내 동료였다. 자네 같은 유능한 전문가들이 필요한 시국이다. 경감으로 일 계급 특진하고 사찰과장을 맡아 주게.”
“핫, 멸사봉공 하겠습니다.”
서장은 빙긋 웃었다.
“이봐 우리는 일제 경찰이 아니다.”
경부보가 개칭된 경찰 계급으로 경위였고 직책은 주임이었는데 그는 과장인 경감이 되었다. 더구나 사찰과는 바로 몇 달 전 일제의 고등과를 개칭한 것이었다. 그리고 해방된 지 불과 한 달 뒤인 9월 중순에 군정경찰은 처음으로 경찰관 채용시험을 일제 때의 경찰강습소에서 실시했다. 무슨 문제를 내고 필기로 답하는 식이 아니고 면접시험이었다. 최달영은 수소문하여 옛날에 정탐조의 순사보조 두 사람과 조선인 형사 등 예전 부하들에게 연락하여 면접시험에 응하도록 했다. 그는 시험관으로 면접을 책임졌다. 면서기나 간수 또는 일제 기관의 용인 사환 등 관청 근처에서 밥 부쳐 먹던 자는 무조건 합격시켰다. 성명 삼자를 써보게 해서 적당히 끄적거리면 문맹자가 아닌 것을 확인하고 합격시켰다.
경찰강습소는 10월에 경찰학교가 되었다. 사령관 하지의 고문이던 윌리엄스는 한국의 보수파 노정객에게 경무부장을 맡을 적임자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때 그는 공산주의 이론에 정통하고 반공사상에 철저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했으며 친일 지주들의 정치집단이던 한민당의 당적을 지닌 채로 조 아무개가 군정청 경무부장에 취임했다. 윌리엄스는 해방된 한국에서 중립이란 거의 불가능하며 급진좌파와 민주우파 밖에 없으므로 양자택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기도 경무부장으로 역시 한민당의 장 아무개가 임명되었다. 미군정 당국의 지원 아래 보수 우파 정당인 한민당은 여러 갈래의 정파들 가운데 서울과 근기 일대의 치안을 담당하는 유일하고 강력한 실권을 장악하게 된 셈이었다.
처음에 군정 당국이 급히 발령을 냈던 서장들 중에 경찰이 아닌 관리 출신의 인사들과 정견이 다른 인사들이 물러나자 서울 시내의 경찰서장 여덟 자리가 비게 되었다. 용산서장이 다른 행정직으로 옮겨 가면서 해방되던 그때에 경부보였던 최달영은 용산경찰서장을 맡으면서 다시 두 계급 특진을 했다. 그의 이력을 주의했던 경무부 간부들의 결정이었다. 해방 이듬해 일월 중순이었으니 경찰서 고등계 형사반장이던 야마시타 경부보가 불과 다섯 달 만에 총경이 되고 용산경찰서장이 된 것이었다. 그는 이름도 최용으로 바꾸었다.
이일철은 영등포 공작창과 경성전기 조선방직 등을 중심으로 산별노조 영등포 지부를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적어도 연말 전에 전국 산별노조 평의회를 결성할 작정이었다. 미군정 당국은 인민공화국 부인 성명을 냈고 이승만이 귀국하여 인공에의 주석 참여를 거부했다.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의 통일전선은 깨지고 말았다.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열망이 있었을 뿐, 그때는 정말 일제 말기보다도 더 캄캄하고 음울한 시간이었다. 제조업 자본과 기술 인력의 팔구십 퍼센트가 일본의 재산과 인력이었는데 일본이 패망하자 자본과 기술자를 일시에 철수 시키면서 대부분의 공장이 가동을 멈추었다. 더구나 남북의 분단은 남쪽에 농업 북쪽에 공업지대로 산업 분담이 되어 있던 것을 막아버리면서 화학 전력 비료 등의 생산품은 남한 내에서 공급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45년 초겨울에 접어들면서 도매물가는 8.15 때 보다 거의 삼십 배 이상 뛰어올랐다. 추곡가를 동결했음에도 쌀값은 수십 배가 뛰었고 일반 서민들은 무엇보다도 쌀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군정당국의 조선은행권 발행으로 통화량은 서너 배로 늘어났다.
신금이는 그 시절을 말할 때마다 그래도 촌에서 중농이었던 김포 친정을 얘기했고 몇 번 도움을 받으러 찾아갔을 적의 일을 떠올렸다.
“글쎄 미군이 경찰과 청년단 앞세워 들이닥쳐서는 집집마다 뒤져서 쌀 공출을 했다는 구나. 매점매석에다 쌀값이 너무 오르니 통제를 하겠다는 건데 그렇게 해서는 배급제를 실시했다. 그런데 그게 공평해질 리가 있겠냐. 중간에 착복하는 것들 때문에 시장이 더욱 혼란해졌지.”
이일철은 그 무렵에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공장 숙직실에서 새우잠을 자거나 다른 공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착실하고 책임감 많던 과거의 가장이 아니었다.
“나는 무엇보다두 지산이가 걱정이었다구. 열네 살에 중학 삼학년이니 한창 먹고 커야 할 무렵 아니냐? 그러구 아버님이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그렇지 얼마나 힘드셨겠니? 며칠 동안 고구마를 하루 세끼씩 드렸는데 매번 빈 그릇이 나와서 힘드시겠지만 애써 드시는구나 생각했지. 그러다가 물김치 보시기 찾으러 공방 안을 들여다보니 아버님이 낮잠을 주무시는 게야. 살그머니 들어가서 그릇을 내오는데 통영반 아래 고구마가 네 개나 그대로 있는 거야. 점심부터 안 드신 거지. 아마 정 시장하시면 나중에 드실라구 남겨두신 게야.”
일본인이 버리고 떠난 공장 기업소들을 노조 자치위원회가 관리하면서 생산의 채비를 갖추고 기계관리 등을 하고 있던 때에 군정당국은 일본인 재산권 취득에 관한 건을 공포 시행했다. 1945년 8월 9일 이후 일본 정부, 그 기관 또는 그의 국민, 회사, 단체, 조합 등이 관리하는 전 재산 및 그 수입에 대한 소유권은 1945년 9월 25일부로 조선 군정청이 취득하고 조선 군정청이 그 재산 전부를 소유한다, 라고 규정되어 있었다. 몇 달 동안 노동자들의 자주적 관리 아래 있던 대부분의 공장과 은행들이 미군정의 소유로 넘어갔다. 이들 공장 기업소는 군정청의 소유가 되었다가 나중에 특정 연줄을 획득한 개인에게로 불하되었고 이들 기업은 나중에 재벌기업의 원천이 된다. 이와 함께 토지 과수원 농장 등은 일제의 동양척식회사의 후신인 신한공사로 귀속되었다. 해방 직후 남한에서는 동양척식회사 소유의 대농장을 소작인들이 대표를 뽑아 농지를 관리하고 있었고 일본인 소지주들은 대부분의 경우 토지를 내버리고 저희 경찰이 있는 도시로 떠나버렸다. 소유자 없는 이러한 토지를 소작인들은 자신의 토지로 삼았고 분배를 할 때에는 지방인민위원회가 주체가 되어 분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같이 농민이 주인이 되어가고 있던 일본인 토지가 미군정으로 다시 귀속되는 과정에서 당연히 농민의 저항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은 과거의 일본 총독부를 능가하는 거대 지주, 거대 자본가로서 남한 땅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미군정은 이렇게 압수한 광범위한 재산을 기초로 통치비용을 조달하고 남한 내 동조세력을 규합했으며 남한을 장기적으로 미국의 영향력 아래 종속시키려 하였다.
신금이는 해방 무렵부터 이듬해 가을까지의 시간을 수십 년의 세월처럼 느꼈다. 그것은 이를테면 말로만 들었던 을축년 대홍수 때에 시어머니 주안댁이 떠내려가는 돼지를 건져서 동네 사람들을 먹이고, 뗏목을 저어서 공작창 노동자들을 살려내고, 버드나무집에서 나무 위에 피난처를 지어서 큰물을 피해 있을 적에 죽었다가 나타나서 두 아들과 식구들을 데려간 저어 까마득한 전설 같은 이야기 보다 더욱 오래된 세월처럼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끔찍하고 무서운 이야기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남북으로 헤어져서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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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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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100년의 역사를 꿰뚫는 방대하고 강렬한 서사의 힘 지금의 우리는, 끊임없이 싸워온 우리들의 결과다 어쨌든 세상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져간다 세계적인 거장 황석영이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로 한반도 백년의 역사를 꿰뚫는다. 철도원 가족을 둘러싼 방대한 서사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