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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80화 : 조선에서 해방은 하루뿐이었다
『마터 2-10』 연재
조선총독부 청무총감 엔또오는 일왕의 방송이 나오기 여섯 시간 전인 8월 15일 오전 6시 조선의 저명한 항일운동가 여운형을 급히 만났다. (2020. 01. 20)
<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일본이 항복했대여!”
박선옥의 외마디 외침에 신금이는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일본이 연합군에 패해서 저희 나라루 돌아간대. 그러면 조선은 독립이 되겠지요.”
신금이는 아직도 그 말이 믿기질 않아서 어안이 벙벙한데 선옥은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방송을 들었고 모두들 작업을 중단하고 거리로 몰려나오고 있다며 설명하자 뒤늦게 울음을 터뜨렸다. 공방에 앉았던 이백만도 나와서 그 소리를 듣고는 셔츠를 걸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노도와 같은 감격과 흥분이 한바탕 휩쓸고 간 뒤에 밤늦게 원행 길을 달려온 이일철이 돌아왔고 그는 보다 더 정확하게 사태를 알고 있었다.
그는 식구들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열흘 전 저녁참에 만주 신경에서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문을 들었다. 신경에서는 일본 본토의 방송보다도 중국 영국 소련 미국의 방송을 청취하는 사무원들이나 지식분자들이 많았고 국적도 다양해서 제법 정확한 뉴스가 시시각각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를 거듭하며 도쿄에까지 미국의 비행기 수백 대가 날아와 대폭격을 퍼부어서 십만여 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도 지난 3월의 일이었다. 이번 방송에 의한 새로운 소문의 내용은 8월 6일 아침에 미국의 B29 폭격기 편대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는 것이며, 이튿날부터 끔찍한 참상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히로시마에서 십여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으며 도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흘 뒤에 다시 B29 폭격기 두 대가 나가사키에 두 번째의 원자폭탄을 떨어트렸다고 했다. 이일철은 이 소식도 뒤늦게 신경에 가서야 들었고 민심은 온통 그 소식으로 들끓고 있었다. 나가사키 폭격이 있었던 8월 9일에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튿날부터 소련 적군은 5천여 대의 탱크와 수백 대의 비행기, 2만 6천여 문의 대포로 무장한 백육십만여 명의 막강한 병력이 세 갈래로 나뉘어 만주와 조선 북방으로 진출했다. 소련 적군의 공세는 독일 베를린을 함락할 때보다 더 빠르고 거센 전격 기동전으로 일본 관동군을 궤멸시켰다. 일본의 항복은 예정되어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원폭 투하와 소련군의 전격전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일본은 ‘연합국의 포츠담선언에 제시된 조건을 수락한다’는 일본 왕의 방송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튿날 8월 16일에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정치범들이 석방되고 군중과 악대까지 나와서 환영식을 하고 서울역 앞과 종로 일대를 시가행진 하였다. 이날 서울 전역에 일본 왕 히로히토의 방송 내용이 한글로 번역되어 뿌려졌고 며칠씩 시간 차이가 있었지만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신민들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지나, 소련 등 4개국의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제국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희열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黃祖黃宗)이 남긴 규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이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원래 짐의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 교전한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勇戰),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의 여정(勵精), 짐의 일억 중서(衆庶)의 봉공(奉公), 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戰局)이 호전된 것이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백성들을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破却)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의 적자를 보호하고 황조황종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비명(非命)에 쓰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戰傷)과 재화(災禍)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厚生)에 이르러서는 짐이 우려하는 바가 크다.
생각하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곤란은 물론 심상치 않고 신민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디어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고 신민의 적성(赤誠)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大道)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를 잃는 일은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擧國一家) 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神州) 일본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精華)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進運)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잘 지키도록 하라.
일왕 히로히토의 공개방송 내용에는 침략에 대한 반성이며 패전에 대한 항복의 의미는 한 글자도 들어있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 영국 등으로부터 동아시아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불가피한 일이었으며 주권 배격과 침략이 그의 뜻이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 내용은 연합군 수뇌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내용으로 얼버무려져 있었다.
해방된 조선의 식자층과 당시의 어느 논객은 뒤에 이렇게 회고했다.
“조선에서 해방은 1945년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서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청에서 발굴된 2천여 장의 편지들은 미군정이 계속되고 있던 1947년 8월에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사절단을 이끌고 서울을 방문했던 미국의 인사가 정보수집차 모은 남한 일반인들의 편지였고, 이는 당시의 민심을 반영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순간적으로 해방의 맛을 보았으나 이제 와서는 구속과 고통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앞서 미군 폭격기 수백 대의 도쿄 대공습으로 십여만 명이 참살당했지만 일제는 국체호지(國體護持)를 내걸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는 참화를 입고서도 즉각 항복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일본 궁내청이 소개한 ‘쇼와천황실록’에 의하면, 히로히토는 소련군이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돌입하던 1945년 8월 9일 오전에 소련군이 대일전쟁을 개시했다는 긴급보고를 받은 지 18분 만에 다급하게 종전을 결정했다.
8월11일에 소련군 선발대는 함경북도 라진에 상륙하고 있었다. 소련군이 경성에서 북동쪽 직선거리로 370km 떨어진 라진에 상륙했을 때, 미군은 경성에서 780km 떨어진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있었다. 소련군의 전격적인 진격속도를 가늠해 본다면 라진에 선발대를 상륙시킨 소련군은 미국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훨씬 전에 한반도를 종단하여 부산과 목포에 각각 도달할 수 있었다. 소련군의 빠른 진공속도를 보고 다급해진 미군 전쟁지휘부는 소련군이 라진에 상륙한 바로 그날 미10군에게 조선을 점령하라는 긴급작전 명령을 내렸다. 남한점령군사령관 존 하지가 지휘하는 제7상륙부대와 미해군 제독 토머스 킨케이드가 지휘하는 제7함대로 구성된 25척의 함대가 인천에 상륙한 날은 9월 7일이었다. 여기서 북한과 남한이라는 개념이 설정된 것은 미국이 정한 38도선에 의한 것이었고, 이로써 그 이북은 소련군의 관할로 이남은 미군 관할지역으로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히로히토가 8월 15일 정오에 라디오를 통해 ‘대동아전쟁종결조서’라는 것을 읽어 내려간 육성녹음을 방송했다. 그것은 명백히 항복방송이 아니라 종전방송이었다. 8.15에 일제가 무조건 항복했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었다. 일제는 1945년 9월 2일 오전 9시 동경만에 정박해 있던 미해군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할 때까지 항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는 어째서 8월 15일에 항복하지 않고 계속 버티다가 9월 2일에 항복하였는가. 그것은 미군이 일본에 상륙하기를 기다렸다가 미국에게 항복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이었다. 미군 7천3백 명과 영군 4백5십 명으로 구성된 미영연합함대가 동경만 요코스카에 입항한 날은 8월 30일이었다.
이른바 천황의 종전 방송이 나오기 열세 시간 전인 1945년 8월 14일 오후 열한 시 경 조선총독부는 소련군의 경성 점령에 대비하는 비상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심야회의를 진행했다. 심야회의 결정에 따라 조선총독부 청무총감 엔또오는 일왕의 방송이 나오기 여섯 시간 전인 8월 15일 오전 6시 조선의 저명한 항일운동가 여운형을 급히 만났다. 만일 소련군이 경성을 점령하면 여운형을 내세워 전후처리 문제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말에 일제의 초청을 받고 도쿄를 방문하는 중에 일제의 회유를 물리치고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여 일본정계를 뒤흔들어 놓았었다. 1922년 초에는 동방민족대표자대회에 참석하여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중에 레닌을 만나 조선독립에 관한 소련의 지지를 이끌어낸 여운형의 특별한 경력 때문에 조선총독부가 다급한 위기의 상황에서 그의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보였다. 엔또오는 8월 16일 오후 2시경에 여운형에게 소련군 선발대가 경성에 들어올 것이라고 말했고, 다시 이튿날인 8월 17일 여운형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 미군이 한반도 남단의 부산과 목포를 점령할 것이며, 소련군은 한반도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할 것이라고 말했다. 엔또오가 여운형에게 그러한 정보를 알려준 날, 일제의 만주국 수도 신경으로 진격한 소련군은 그 도시에 주둔한 관동군사령부를 점령 접수했다.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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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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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100년의 역사를 꿰뚫는 방대하고 강렬한 서사의 힘 지금의 우리는, 끊임없이 싸워온 우리들의 결과다 어쨌든 세상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져간다 세계적인 거장 황석영이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로 한반도 백년의 역사를 꿰뚫는다. 철도원 가족을 둘러싼 방대한 서사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