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불후의 칼럼 > 허남웅의 영화경(景)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나를 돌아봐 그대 나를
대상화를 거부하는 여인들의 욕망
이제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의 초상화 작업은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와 겹친다. 그림 그리기와 사랑이 하나 된 활동으로 존재한다. (2020.01.17)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한 장면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초상화가다. 의뢰받고 가는 길이 순탄치 않다. 물 넘고 바다 건너 어슴푸레한 시각에 도착한 해변에 거대한 돌기둥이 서 있다. 이 밑을 지나 어느 귀족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이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신화의 기운이 물씬한 이곳에서 마리안느가 그려야 할 초상화의 ‘대상’은 엘로이즈(아델 에넬)다.
마리안느 전에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작업하러 왔다가 포기하고 물러난 화가가 있다. 엘로이즈가 포즈를 취하기를 거부해서다. 이는 결혼을 거부한다는 엘로이즈의 의사 표현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딸의 의사와 상관없이 초상화만 완성되면 예비 사위에게 보낼 생각이다.
엘로이즈의 어머니도 그랬다. 부모가 자식 대신 정략적으로 결혼을 약속하고 예비 신부의 초상화를 남자에게 보냈다. 그때 초상화가 저택에 아직도 걸려 있다. 치장한 얼굴은 아름답고, 가슴 패인 드레스는 섹시하고, 무릎께 모은 두 손은 조신하다. 남성의 시선으로 ‘대상’화 된 여자의 초상이다.
그러니까, 엘로이즈가 거부하는 건 자기 뜻과 다른 결혼을 포함해 여성의 생각과 활동을 제약하는 모든 것이다. 마리안느도 여성 화가의 활동을 제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작품을 발표해왔다. 여성이되 가부장의 룰을 체화한 엘로이즈의 어머니는 초상화를 그릴 5일의 시간을 주고 저택을 떠난다.
그때부터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와 하녀 소피(루아나 바야미)는 여성을 옥죄는 모든 제약과 제한으로부터 시한부적인 자유를 맞이한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민하는 소피를 위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자기 일인 양 힘쓰는 연대의 자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서로를 향한 사랑의 자유를 만끽한다.
초상화가로 처음 이 저택을 방문했을 때 엘로이즈를 전형적인 초상화의 규칙과 규범의 대상으로 바라보던 마리안느는 둘 사이에 욕망의 불꽃이 일자 진실한 감정이 개입한 동등한 시선의 존재로 서로를 포갠다. 이제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의 초상화 작업은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와 겹친다. 그림 그리기와 사랑이 하나 된 활동으로 존재한다.
“누드도 그려요?” , “중요한 주제들은 여성을 비껴가요. 여성 화가의 활동을 제한하는 거죠.” , “그럼 안 그려요?” , “몰래 그려요.” 이 대화가 단순히 여성으로서 화가에게만 국한된 의미가 아닌 것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 또한 엘로이즈의 어머니, 즉 유사 가부장이 없는 동안 ‘몰래’ 이뤄지는 조건부의 자유인 까닭이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와 소피는 카드 게임을 하던 중 오르페우스 신화 이야기를 나눈다. 아내를 잃은 오르페우스는 하데스를 찾아가 저승의 동굴 밖으로 나갈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에우리디케를 이승으로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포스터
이제 동굴의 출구만 넘어서면 되는데 그새를 참지 못하고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가 잘 따라오는지 궁금해 뒤를 돌아본다. 그 즉시 아내는 하데스가 있는 지하에 유폐되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영원히 서로를 그리워하며 산다. 이에 대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와 소피는 왜 돌아봤느냐며, 아내가 부른 것이었다며 등등의 다양한 해석을 펼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현실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다. 애초 마리안느가 저택을 찾을 때 어두운 시간 동굴 입구와 같은 돌기둥을 통과한 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이 오르페우스 신화를 우회한 현실의 반영이란 가이드성 설정이다. 당시 현실에서, 이들의 사랑이 이뤄지는 저택은 하데스의 재현인 엘로이즈의 엄마가 지키는 동굴이다.
이 저택을 나와 바다를 넘어 세상으로 나간다는 건 오르페우스가 고개를 뒤로 돌려 에우리디케를 확인하는 일이다. 세상 밖은 여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이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하나의 해석만 존재한다. 동굴을 나온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사랑을 지속할 방법은 서로 떨어져 지내며 그림과 같은 예술을 통해 상대방을 오래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다.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나눌 때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의 입장을 이해한다면서도 그 선택의 배경에 관해 이렇게 견해를 제시한다. “그녀와의 추억을요. 그래서 뒤돌아본 거예요. 연인보다는 시인의 선택인 거죠.” 저택을 나와 각자의 길을 가게 된 마리안느는 오페라 극장에서 엘로이즈를 목격하고 그녀를 쫓아가듯 바라본다. 그때 엘로이즈는 연인과 시인 중 어떤 쪽을 선택할까. 과연 고개를 돌릴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YES24 채널예스
관련태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대상화, 초상화, 그림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