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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의 모두 함께 읽는 책] 빨강 할머니들의 건투를 빈다

<월간 채널예스> 2020년 1월호 『빨강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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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여성이다. 할머니는 인간이다. 할머니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이 그림책은 긴 세월 할머니들의 것이었던 바늘과 실의 목소리를 빌어 그렇게 말한다. 내년 겨울도, 내후년 겨울도, 우리 멋진 빨강 할머니들의 건투를 빈다. (2020. 0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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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_ 조혜란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뼈로 바늘을 만들어서 가죽옷을 꿰매 입었다. 바늘이 우리와 함께 해 온 시간은 그만큼 길다. 그러나 바느질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오랫동안 여성의 일로 여겨졌다. 작은 공방에서 정교한 솜씨를 발휘해서 느릿느릿 진행되는 바느질 작업을 두고 여성이 가족을 위해서 감수하는 희생과 인내의 상징으로 부르면서 그 작업의 예술적 가치를 낮추어 사적인 영역에 가두곤 했다. 박씨전에서 박씨가 시아버지로부터 인정받은 것은 그가 하룻밤 안에 뛰어난 솜씨로 시아버지의 옷을 지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옷에 봉황과 푸른 학을 수놓았는데 따를 자가 없었다고 기록된다. 여성의 일은 예술적 행위로서 공적인 의미를 인정받지 못했다. 백 년 전 동경여자미술대학의 여성 유학생 박을복은 자수보다는 동양화를 전공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주로 여자들이 하는 자수는 회화보다 뒤떨어진 것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차별적인 태도에 맞서 바느질의 의미와 예술적 가치를 조명하고 바느질이라는 행위를 전복적으로 재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림책에서도 그러한 노력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패트리샤 폴라코의 1988년작 『할머니의 조각보』 는 러시아계 이주 여성 노동자의 분투와 정착을 지켜보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세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은 바느질 조각보가 등장한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주머니 속에 뭐가 있을까』 는 작가가 자투리 옷감을 바느질해서 만든 수수께끼 그림책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의 바느질은 다양한 인종의 어린이들을 친구로 엮어주는 상상의 매개자가 된다. 돌봄의 맥락을 벗어나 논리적 추리 활동의 동반자로 활약한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는 또 다른 그림책 『작은 발견』 에서 해묵은 골동품점에서 발견된 실패를 단서로 삼아 가느다란 실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기도 한다.

 

조혜란 작가의 『빨강이들』 은 우리 여성들의 생애사를 바느질이라는 예술 행위로 새롭게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할머니들이 빨간 버스를 타고 단풍놀이를 떠나는 이 한 권의 그림책에는 조혜란 작가가 그동안 꾸준히 붙잡고 탐구해온 예술적 고민이 집약되어 있다. 2007년작 『할머니, 어디 가요? 쑥 뜯으러 간다』 는 바닷가 마을에서 손녀를 키우는 할머니의 역동적인 동작과 표정으로 출간되자마자 큰 관심을 모았다. 선명한 빨강 저고리를 입은 할머니의 단단한 하체 근육과 거리낌 없는 몸짓, 호방한 웃음, 폭넓은 동선은 다소곳하고 유약한 할머니의 상을 전면적으로 뒤집는 것이었다. 『할머니, 어디 가요?』  시리즈 원화를 전시했던 2010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세미나에서 각국의 그림책 관계자들은 “저 할머니의 강한 빨강색의 저고리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당시 조혜란 작가는 “할머니는 늘 왜 미지근하게 위축 되어야 하나요? 나는 뜨겁고 즐겁게 달리는 할머니를 그리고 싶었어요.”라고 답변했다. 지금은 우리 그림책 중에 할머니를 적극적인 삶의 주체로 다시 바라보는 작품이 늘어났지만 그 본격적인 시도는 이 작품이 처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활발한 그림책 속 페미니즘 리부트가 일어나기도 한참 전의 일이다.

 

이 그림책은 그가 긴 시간 내공을 쏟아부어온 바느질 그림책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상추씨』 (2017), 『노랑이들』 (2017)에 이어서 온전히 작가의 바느질만으로 창작된 이미지다. 이 그림책에서 바느질이라는 오랜 역사적 행위는 가장 화려하게 전복적인 맥락으로 빛난다. 할머니들의 은발과 곱슬머리는 작가의 바늘이 지나는 길을 따라 생명력을 얻고 되살아났다. 수놓은 주름살은 바느질만이 보여줄 수 있는 탄탄한 생기를 지녔다. 빨강 버스를 타고 인생의 터널을 지나는 할머니들의 뒷모습은 뭉클하고 겨울을 맞는 나무를 뜨개질한 옷으로 감싸주는 장면에 이르면 눈이 시큰하다. “올 겨울을 잘 넘겨야 해.”라는 한 문장은 절정의 장면이다.

 

할머니는 여성이다. 할머니는 인간이다. 할머니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이 그림책은 긴 세월 할머니들의 것이었던 바늘과 실의 목소리를 빌어 그렇게 말한다. 내년 겨울도, 내후년 겨울도, 우리 멋진 빨강 할머니들의 건투를 빈다.


 

 

 

 


 

 

빨강이들조혜란 글, 그림 | 사계절
빨간 버스를 타고 단풍놀이를 가서, 알록달록 물든 나무와 산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흐름입니다. 이웃의 한 할머니의 일상 같은데, 그 안에서 삶의 단면과 할머니들의 마음의 변화가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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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은(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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