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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있어서 깊어요

<월간 채널예스> 201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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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음으로는 일곱 살짜리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오늘 아침에 쓴 편지랬다. (2019. 1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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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손은경

 

 

물구나무를 서면서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그 역시 물구나무를 자주 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원목 마루 위에서 단단한 몸을 거꾸로 세운 채 숨을 몰아쉴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난봄의 어느 날은 할아버지의 팔순 생신이었다. 나는 그가 갖고 싶다고 미리 말했던 서예용 붓과 금분을 사서 포장을 하고 편지를 쓴 뒤 답십리로 갔다. 총 열네 명의 가족이 모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나, 동생, 작은아빠, 작은엄마, 동갑내기 사촌 형제 두 명, 막내 작은아빠, 막내 작은엄마, 어린 사촌 자매 두 명. 이 많은 사람이 모두 함께 고깃집에 갔다. 나는 비건 지향 인생을 살아가는 중이지만 할아버지에게 채식 어쩌고 동물권 어쩌고 얘기하는 것이 피곤하여 두말없이 따라갔다. 그곳은 아주 어수선했고 우리 가족 또한 아주 어수선했다.


가족들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만 나누며 밥을 먹었다. 정말로 꼭 하고 싶은 말을 누구 하나라도 시작한다면 이 가족은 파탄이 날 것이다. 며느리들과 아들들과 시부모 사이에 몇 차례의 전쟁이 발발하여 이혼과 의절로 마무리될 것이다. 지난 세월 동안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주며 살아왔으니까. 오늘 팔순을 맞이한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의 생을 축하하는 날이었다. 모두가 진심을 조금씩 외면한 결과, 식사 자리는 순탄하였다. 정확히는 며느리들이 참고 있기 때문에 별탈이 없는 듯했다. 내 또래의 사촌 형제와 동생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소갈비를 5인분이나 먹었다. 엄마들과 아빠들이 앉은 테이블에도 몇 대의 갈비가 추가되었다. 조용히 밥과 된장국만 먹는 내 입가에 할아버지는 숯불갈비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속이 안 좋다며 사양했다. 할아버지에게 굳이 말하지 않는 것들은 이것 말고도 많았다. 누드모델을 몇 년간 했던 것, 담배를 피우는 것, 언제나 애인이 있었던 것, 자유한국당을 우스워하는 것 등.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의 옆모습을 보았다. 옛날보다 많이 늙어 있었다. 여든이니까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충격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의 머리칼이 온통 검었던 것이다.


“할아버지, 흰머리 다 어디 갔어요? 염색했어요?”


그는 내가 이걸 물어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몇 달 전부터 검은 머리가 막 나더라고.”


“말도 안 돼.”


“진짜야. 할머니한테 물어봐.”


“할머니, 진짜예요?”


할머니는 쌈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말이 되는 현상이야?”


내가 묻자 사촌들은 어깨를 으쓱했다. 할아버지는 이게 모두 규칙적인 운동과 식습관 덕분이라고 덧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머리가 온통 희던 사람이 여든 살 무렵에 다시 검은 머리가 나다니. 알 수 없는 현상이었다. 다시 보니 그의 흑발은 딱딱하게 굳은 채로 꼿꼿하게 수직으로 서 있었다. 그가 무스를 잔뜩 발라 세웠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이지 확실하게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다시 답십리 집으로 돌아가서 떡 케이크를 꺼냈다. 열네 명이 불협화음으로 축하 노래를 불렀다. (“사랑하는 우리 할아버지~ 생신 축하합니다~“) 촛불은 일곱 살짜리 사촌 손녀가 후 불어서 껐다. 우리 집에서 촛불을 끄는 것은 언제나 어린아이들의 몫이었다. 어린이들만이 그 일에 설렘을 느끼기 때문이다. 노래를 다 부르고 촛불도 꺼서 어색해질 즈음에 나는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건넸다. 붓과 금분과 편지가 담긴 봉투를. 할아버지는 고맙다고 말했다.


나 다음으로는 일곱 살짜리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오늘 아침에 쓴 편지랬다.

 

아주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할아버지가 있어서 깊어요.’


그걸 보고 할아버지가 웃었다.


“기뻐요를 잘못 썼구나!”


가족들도 막 웃자 어린 손녀는 창피했는지 다리를 배배 꼬았다. 그러는 모습이 슬아 어릴 적과 많이 닮았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나도 어렸을 때 부끄럽기만 하면 다리를 배배 꼬았댔다. 나는 어린 사촌 동생을 한 번 껴안아 봤다. 기쁘다는 말을 깊다고 잘못 쓴 그 애한테서는 아기 냄새가 났다. 나도 할아버지가 있어서 깊다고, 사랑도 미움도 연민도 재미도 여러모로 깊다고, 미래의 어느 날에 걔한테 말해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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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슬아(작가)

연재노동자 (1992~). 서울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다. <이슬아 수필집>,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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