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가 특집] 오후 2시, 서재의 풍경 – 조경국 작가
<월간 채널예스> 2019년 11월호
은은한 커피 향, 연필이 놓인 책상,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 조경국 작가의 서재이자 일터 ‘소소책방’은 한가로운 오후 2시를 맞이하고 있었다. (2019. 11. 06)
경남 진주의 한 책방, 만화책이 들어찬 책장 앞에 편안한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주인이 가장 애정하는 공간이다. 이곳 주인은 7년째 헌책방을 운영 중인 조경국 작가다. 『윤미네 집』 등 사진책을 엮는 편집자로 일했고, 『필사의 기초』 , 『오토바이로, 일본 책방』 , 『책 정리하는 법』 등 을 썼다. 책을 “늪”이라고 말한 그는 책이 좋아 헌책방까지 하고 있으니 책에 발목이 제대로 잡혔다며 웃는다. 오늘도 책들과 함께 나른한 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책과 친구 맺기
중, 고등학교 때 게임을 좋아해서 헌책방으로 컴퓨터 잡지 과월호를 사러 다녔어요. 당시 진주 시내엔 8군데 헌책방이 있었는데, ‘중앙서점’이라는 곳을 단골로 다녔죠. 새 책방에 갈 때는 어떤 책을 살지 마음먹고 가지만 헌책방은 정해놓고 간들 살 수가 없어요. 보물찾기를 하는 매력이 있죠. 그 기억이 강했나 봐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중에 고향에 내려가서 헌책방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꿈을 이뤘죠(웃음). 돈을 못 버는 것만 빼면 굉장히 행복합니다. 어제는 술을 얼큰하게 드신 동네 어르신이 오셔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표정으로 책 한 권을 사 가셨어요. 『계간미술』 이라는 오래된 잡지인데, 제가 생각하기엔 도저히 팔릴 수 없는 책이었거든요. 헌데 이렇게 주인을 찾아 가네요. 책이란 게 이렇게 묘한 녀석입니다.
그 시절 나의 인생 책
학력고사를 치르고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읽었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이라는 소설책이요. 1327년 11월의 이탈리아 어느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살인 사건을 다룬 이야기인데, 어렵기도 했지만 소설의 재미를 알게 해 준 책이죠. 그 전까진 교과서에 나오는 국내 소설만 읽었거든요. 시대를 관통하는 웅장한 스토리, 흥미진진한 스릴러 등 당시의 제겐 충격 그 자체였어요.
첫 서재
대학생 때 헌책방을 순례하며 게임과 관련된 잡지를 사 모았어요. 방 한쪽에 컴퓨터 잡지를 순서대로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재미가 있었죠. 헌데 군대에 다녀오니 어머니가 그 책들을 미련없이 다 버리셨더라고요(웃음). 지금까지 갖고 있었으면 꽤 재미난 컬렉션이 될 수 있었을 텐데요.
내가 꿈꾸는 완벽한 서재
천장이 아주 높고 그 끝까지 철재 서가가 있는, 길고 좁은 직사각형 형태의 서재요. 남쪽으로는 창이 있고 넓은 책상과 편안한 의자가 놓여진 10평 정도의 공간이 저의 ‘로망 서재’입니다. 아, 서재 입구에 진열해두고 싶은 책도 있어요.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불리는 상허 이태준 선생님의 산문집 『무서록(無序錄)』 의 초판본인데,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가장 존경하는 작가님이기도 하고, 『무서록』 은 80년 세월을 넘어 지금도 판매되는 스테디셀러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나 책을 닮고 싶어 하잖아요. 글을 쓸 때, 책을 읽을 때, 독자를 대할 때, 책을 다루는 태도에 대해서도 작가님은 좋은 귀감이 됩니다.
책상과 책갈피
저는 좋은 책상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서재에서 가장 중요한 게 책상이라고 생각해요. 널찍하고 편안하고 그럼에도 평범한 느낌의 나무 책상이요. 그 다음은 책갈피예요. 제가 책갈피 콜렉터이기도 한데, 헌책 안에 꽤 재미난 책갈피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편지, 월급 명세서, 벌금 통지서가 끼워져 있는 경우도 있고요. 엊그제는 필체가 예쁜 손 편지를 발견했어요. 이렇듯 책에 끼워져 있는 종이 조각을 모으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아, 현금이 들어있는 경우도 한 번 있었어요. 5,000원짜리 옛날 지폐요.
남의 서재 엿보기
취향이 비슷한 분을 만나면 반갑고, 그 반대인 분을 만나면 배움의 즐거움이 있죠. 서재라는 공간은 친밀하지 않으면 보여주기 힘든 곳이잖아요. 그래서 기회가 생기면 열심히 훑어보는 편입니다. 혹시 『무서론』 초판본이 있을지 어떻게 압니까(웃음).
특별한 책, 특별한 보관법
어릴 때부터 공부는 못했지만 책을 소중히 다뤘어요. 책에 밑줄을 긋거나, 지우지 못하는 펜으로 책 안에 글을 쓰는 걸 싫어했어요. 좋은 문장이 있으면 공책에 메모를 해두었죠. 책싸개를 하는 습관도 있었고요. 지금 저에게 몇 권의 특별한 책이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온 어네스트 허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라는 책인데, 너무 오래되어서 제습기로 습기를 없앤 다음 밀봉해서 보관 중이에요. 해방 이후 처음 나온 기타 코드집도 지퍼 백에 보관 중이고요. 지우개 보다 조금 큰 가죽 표지의 미니 성경책은 가죽용 오일을 발라서 휴지에 싸서 보관 중이에요. 우리나라의 인쇄 기술이 일본이나 독일에 떨어진다고 하는데 알고 보면 우리나라가 성경책을 꽤 잘 만드는 나라라고 해요. 모든 책들이 그렇듯이 더는 훼손되지 않게 보관하는 게 중요합니다.
멍하니 서재에 있는 시간
그럴 때면 자연스레 손이 가는 책이 있어요. 최승자 시인의 번역본인데,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라는 책이에요. 여러 번 읽기도 했고 필사도 2번이나 했죠. 눈으로 보거나 경험한 어떤 사건이나 장면을 글로 표현하는 게 참 어려운데, 이 책은 지식과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켜서 글로 표현하는 방법의 표본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까요. 나이가 들수록 호감이 더 가는 책이에요.
미니멀한 집에 대한 로망
최근에 오토바이를 타고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했어요. 113일 정도 다녀왔는데 오토바이에 달려있는 작은 상자 3개와 배낭 하나 정도의 짐으로 부족함이 없었어요. 여행이 끝나갈 무렵, 한국으로 돌아가면 살림을 줄이자 싶었죠. 그 살림이 결국 책입니다. 도서관도 전자책도 이용할 생각입니다. 맞아요, 미니멀한 집에 대한 로망이 있죠. 예전에 책에서 주인공이 100권의 책을 거실 벽에 꽂아놓고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훑어보는 모습을 묘사한 장면을 읽었어요. 평생 내가 가지고 다닐 책, 딱 100권을 선별해서 집에 보관하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그 장면에 공감이 많이 됐어요.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끝끝내 버릴 수 없는 책
문익환 목사님과 신학계 저명한 인사들이 공동 번역한 성서예요. 절판이 되기도 했고, 다시 구하기 힘들 것 같아 끝끝내 포기가 안 되는 책이죠. 저는 종교인이 아닌지라 독서인의 입장에서 교양으로 성서를 읽는데, 너무나 매끄럽게 우리말로 번역을 해 놨어요. 특히 시편을 읽어보면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책 정리하는 법조경국 저 | 유유
무거운 책을 손쉽게 옮길 수 있는 유용한 몇 가지 방법과 아끼는 책이 상하지 않도록 책을 싸고, 조금만 거칠게 다루어도 바스라질 것 같은 오래된 책을 보관하고, 시간을 거스르지 못하고 상한 책을 손보는 방법도 담겨 있습니다.
관련태그: 조경국 작가, 책 정리하는 법, 소소책방, 침묵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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