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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60화 : 살 수 있다면 살아남아야지

『마터 2-10』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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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시타는 즉시 버드나무집으로 이일철을 찾아왔다. 일철은 그를 데리고 시장 사거리 모퉁이의 주점으로 갔다. 최달영은 일철이 따라준 막걸리를 주욱 마시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2019. 1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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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이철은 아직 접선한 일이 없는 권모의 레포를 만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는 영등포의 정리가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제당과 경성 재건파의 연결 고리를 끊을 생각이었다. 현재 일본 측이 찾고 있는 것이 국제당 선이었고 경성 재건파는 류재익의 탈출을 전후하여 수백 명이 이미 검거 되었다. 그는 박선옥을 먼저 만나 사정을 미리 알려주었고, 도피를 하든가 검거 되더라도 자신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하여 잔심부름이나 한 것으로 진술하라고 당부해 두었다. 그리고 국제당에 선을 대고 있었던 조영춘과 지씨에게는 방우창이 곧 체포될 것이며 선택은 각자에게 맡긴다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박선옥을 지켜줄 것을 부탁했다. 언제든 한 지역에서 불씨는 남겨 두어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조영춘은 자신의 독서회 회원들은 일반 노동자들이니 검거 되어도 아는 것이 별로 없고 피해도 적을 것이라며 시간을 끌다가 그들의 명단을 내어줄 작정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실 그는 방우창 이외에 영등포 바깥의 조직들과 직접 연결된 바는 없었던 것이다. 이철은 날이 밝자마자 자신의 집 부근에 잠복조가 배치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물론이고 아내 한여옥도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철은 버드나무집에 갈 수도 없어서 박선옥을 통하여 형수에게 연락을 해주도록 부탁했다.

 

신금이는 시동생과 그의 아내 한여옥이며 그때는 아직 출산 전이었던 장산이의 운명에 대하여 자세한 것까지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다. 박선옥이 두 손을 쳐들고 부들부들 떨며 위급한 상황을 알리러 왔던 것이며, 저녁 짓던 일조차 팽개치고 집을 나서던 일을 말할 때면 언제나 그렇듯 시어머니 주안댁의 출현을 빼놓지 않았던 것이다.

 

 “동네 교회당 유치원 앞마당이 약속 장소였다. 집을 나서는데 벌써 주안댁이 내 앞 세 발짝 앞에서 슬슬 걸어가구 있는 게야. 나는 그이에게 말두 걸지않구 아는 길이라 그냥 발 가는대로 갔지. 교회는 벽돌담이 둘러있구 앞에 철창문이 열렸는데 미끄럼틀이며 그네가 있지. 그 안으루 들어갔더니 시동생이 바로 문 옆의 어둠 속에 섰다가 형수님, 하구 나를 불렀어.”

 

이철은 상황을 대충 얘기하고 아내가 막음이 고모에게 간 것이며 두 사람 다 도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금이가 어디로 갈 작정이냐고 물으니 아직은 정해놓은 데가 없지만 어쨌든 영등포에서는 벗어나야 한다는 거였다. 그때에 두 사람 옆에는 주안댁이 구부정한 자세로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녀가 현신하면 보통은 말없이 앉았거나 서있거나 따라오는 정도였는데 그날따라 신금이의 귀에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시키니 그 누구냐, 야이덜 다님 선생 하던 사람 있지 않냐. 그 최 머시기라구, 느이 혼인 때 주례 서준 얌전둥이 말이다. 글루 가서는 숨어 있으문 되겠구먼 그래.”

 

 “아 좀 가만 계세요.”

 

신금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이철은 금방 눈치를 채고는 형수에게 물었다.

 

 “어머니 나타나셨어요?”

 

 “응 아니 머 집안에 걱정꺼리 생기면……늘 그러시잖아요?”

 

 “뭐라시는데요?”

 

 “글쎄 최 선생님 댁에 가보라구 하시네요.”

 

이철이 옆으로 돌아서더니 그야말로 진지한 태도로 어둠 속을 향하여 절을 꾸벅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신금이에게 말했다.

 

 “그 댁이 어딘지 아시지요?”

 

 “그야 저희는 알죠. 지난 추석 전에도 찾아뵈었으니.”

 

신금이는 시동생을 데리고 도림정으로 갔다. 그들 형제가 다니던 보통학교 길 건너에서부터 영단주택 동네가 시작되고 있었다. 최 선생 댁에 가니 마침 저녁상을 차리던 때라 신금이는 몹시 민망했다고 한다. 사모님도 그들 형제를 잘 알고 있었고 신금이를 며느리처럼 생각하는 터여서 그들의 느닷없는 방문을 오히려 반가워했다. 저녁을 얻어먹고 나서 이철이 지금의 상황을 털어 놓았다. 최 선생이 말했다.

 

 “자네가 사상운동을 한다는 얘기는 얼핏 들었다마는 나중에 잡힐 때 잡히더라도 예봉은 피해야 한단 옛말이 생각나는구먼. 거친 풍파가 지날 때까지 숨어 있어야겠네.”

 

 하고는 오늘은 일단 선생 댁에서 자고 내일 날이 밝자마자 관악산 기슭의 시골집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의 고향집은 시흥군 나꿀이었고 바로 영등포와 접경에 있는 마을이었다. 관악산 줄기의 야산이 둘러싸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면 갑자기 외진 두메 산골처럼 되어버리는 아늑한 곳이었다. 어느 여름방학에 선생을 따라 형제가 그 댁에 놀러가서 이틀을 보낸 적도 있었다. 신금이는 주안댁이 최선생 댁을 찾아가라고 일러줄 적에 두말없이 방향을 정한 것은 막음이 고모가 홍수 때 시어머니가 나타나서 도와주었다는 얘기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남편 일철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잘했다고 고개를 끄덕여주기까지 했다. 그는 아우 이철이 보다 더 어머니의 현신을 굳게 있었고 자기가 체험하기까지 했던 까닭이었다. 이튿날 이철이는 최선생을 따라서 나꿀로 갔다. 시골집에는 최 선생의 노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지금은 선생의 아우님이 살며 농사짓고 있었다. 그 댁 사랑에 너른 방이 두 개나 있어서 이철은 신세를 지기로 하였다.

 

인천에서는 김근식을 비롯한 활동가 몇 명이 드러나지 않은 채 남은 조직을 간수하고 있었지만 영등포에서는 지난 두어해 동안 벌어졌던 각종 파업 쟁의에 관련되었던 일반 노동자들이 일제히 검거 되어 조사를 받았다. 안대길 조영춘 지씨 박선옥 등은 일차로 검거 연행되었다. 영등포 서에 잡혀온 노동자들은 대략 사십여 명이었다. 그중 방우창에 대한 조사가 가장 혹독했고 그가 취조 중에 사망하자 전과가 있는 안대길에게 남은 문초가 다시 집중되었다. 이철이 방우창 안대길 지씨 등과 영등포 철도 공작창 시기부터 최초의 오르그였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철이 재건파 중앙과 연결되는 주요 연락원이라는 사실이며 그의 아내 한여옥이 국제당 파견자 김형신의 레포였다는 것까지 밝혀졌다. 야마시타는 즉시 버드나무집으로 이일철을 찾아왔다. 일철은 그를 데리고 시장 사거리 모퉁이의 주점으로 갔다. 최달영은 일철이 따라준 막걸리를 주욱 마시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철이가 잡히지 않으면 너희 집안은 풍비박산이 될 거다.”

 

일철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어느 집에나 말썽꾼이 있지 않냐? 나는 총독부의 학교를 나오고 직영 철도국에 다니는 투철한 황국신민이다. 네가 알다시피 우리 아버지도 거의 평생을 철도 공작창에서 기술자로 살아오며 어떤 과오도 없이 충실하게 살아온 분이다. 내가 어떻게 협조하면 되겠는지 제발 좀 알려다우.”

 

최달영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를 자수시키면 된다. 내가 너하구의 의리를 생각해서 첨에 인천에서 마주쳤을 때에도 일부러 잡지 않고 놓아줬던 거야. 다른 놈들 취조를 하는 중에 이철이의 죄상이 다 드러나서 나로서도 더 이상 봐줄 수가 없게 되었다. 그 녀석 마누라도 같은 주의자로서 연락원이었다구 한다. 지금이라도 당장 체포할 수 있다. 지금 둘이 같이 있나?”

 

일철은 다급하게 말했다.

 

 “제수가 지금 만삭이라 출산이 오늘 내일 하는 중이다. 그 사람이야 남편이 시켜서 심부름한 것에 지나지 않을 테지. 한 가지만 약속해 주면 내가 아우를 설득해서 자네에게 넘기도록 하겠다.”

 

 “너무 무리한 게 아니라면……좋다!”

 

 “출산을 앞둔 제수씨를 체포하지 말아 주게. 내가 바라는 건 그것 하나 뿐이야.”

 

최달영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좋다, 이철이가 전향을 하겠다면 그의 아내는 약식으로 조사만 하고 방면해 주지.”

 

 “어떻게든 설득해 보겠다.”

 

 “그 대신 질질 끌면 안 된다. 만약에 이철이가 도피 중인 류재익의 소재를 분다면 녀석도 즉시 훈계방면 조치할 작정이다.”

 

이일철은 아내 신금이로부터 아우가 최선생의 나꿀 시골집에 은거해 있다는 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는 비번이 돌아온 날 나꿀로 이철을 찾아갔다. 아우는 형이 직접 찾아온 것을 보고 놀랐다. 일철은 최달영과 나눈 이야기를 그에게 털어 놓았다.

 

 “어떻게 형이 나에게 이럴 수가 있어? 아무리 일제의 노비 노릇을 하여 먹고 살지만.”

 

 “그래 아버지는 평생 쇠를 깎으며 엄마도 없이 우릴 키웠고, 이제 내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집안을 꾸려가야 할 거다. 네가 욕을 하지만 나라 없는 백성들은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도 말씀은 안 하시지만 나처럼 너를 자랑스러워하실 게다. 헌데 네 아내와 장차 태어날 아이는 어떻게 할 테냐? 활동가를 하겠다면서 왜 아낙은 들이구 그래? 네 처자식은 보호해야 할 거 아니냐?”

 

이철은 눈물이 흐르자 닦지도 않고 얼굴을 위로 쳐들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누군 그러구 싶었나 뭐.”

 

 “니가 전향서 쓰면 제수씨는 훈계방면 한다구 약속했다.”

 

 “동지들을 생각해서두 그럴 수는 없다구. 차라리 고문 받다 죽는 게 낫겠지.”

 

일철은 아우에게 진심을 다하여 달래고 또 달랬다.

 

 “방우창씨가 검거 첫날을 넘기지 못하고 취조 중에 죽었다고 하더라. 살 수 있다면 살아남아야지. 그까짓 종이쪽지가 무슨 소용이야. 욕스러운 건 견디어 내야지. 몸이 부서지지 않게 살아남았다가 다시 싸울 수 있잖아? 너는 유명인사도 아니고 지도부도 아니잖아.”

 

형제는 그날 함께 밤을 새웠다. 겨울바람이 불어와 창호지 문짝을 흔들어댔다. 일철이 몇 번이나 돌아누우며 잠을 못 이루다가 까무룩하게 잠이 들려는 참인데 아우가 어둠 속에서 중얼거렸다.

 

 “형 자나?”

 

 “응? 아니.”

 

 “내일 같이 영등포 나가자.”

 

 “정말이지?”

 

이철은 잠깐 멈추었다가 말했다.

 

 “먼저 여옥씨 만나고 모레 최가를 만나도록 할게.”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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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석영(소설가)

「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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