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에 갇힌 아이들의 어른다운 선택 -뮤지컬 <머더러>
일하지 않으면 먹을 자격이 없고, 다수를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이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아이들은 그렇게 배웠다
다섯 명의 아이들은 새끼 여우의 등장 이후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탓하고 비난할 사람’을 찾는다. (2019. 10. 16)
2차 세계대전이 지나간 자리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다섯 명의 아이들은 수용소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고 있다. 언젠간 어른들이 자신을 구해줄 거라 믿고 짙은 안개가 피는 날이면 열심히 발을 구른다. 안개가 피는 날이면 멀리까지 소리가 전해진다던 엄마의 말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기억하는 세상의 언어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수용소에 갇힌 여섯 명의 아이들
뮤지컬 <머더러> 는 어른들의 언어와 행동을 통해 세상을 수용한 아이들이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 아프게 보여준다. 독일의 극작가인 게오르크 카이저의 희곡 『메두사의 뗏목』이 원작이다. 원작은 독일 어뢰정의 격침으로 영국기선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어린이들이 구명보트를 타고 7일간 표류한 사실을 담은 기사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극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원작과 다르지 않지만, 극의 배경과 아이들의 숫자 등 디테일한 부분이 달리 표현되었다. 원작의 배경은 바다 위 보트지만, 뮤지컬 <머더러> 는 세상과 단절되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회색빛 수용소 안이다.
수용소는 노출콘크리트와 벽돌로 표현했다. 수용소에서 입던 줄무늬 옷을 똑같이 입었어도 아이들은 저마다 개성 있다. 앨런은 타인의 판단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행동한다. 앤은 어른들의 말로 아이들을 이끌어 엄청난 계획을 실행하는 인물이다. 수용소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가장 많이 하는 인물은 피터이고, 겁이 많은 사람은 토미다. 그런 토미의 곁에서 늘 다정한 말을 건네는 게 에릭이다. 그렇게 다섯 명은 서로에게 기대며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그때 새끼 여우가 등장한다.
아름다운 위로로 느껴지는 새끼 여우의 춤
온몸이 빨간 그를 아이들은 새끼 여우라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들과는 입은 옷도 다르고 말도 하지 못해서 이름이 아닌 새끼 여우라는 별칭을 얻는다. 힘이 없어서 발을 구르지도 못하는데 먹을 수는 있다. 일하지 못하는데 먹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새끼 여우는 미움받기 시작한다.
새끼 여우를 미워하는 데는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했다. 앤은 먼저, 새끼 여우가 나타나면서 ‘우리들이 정한 질서’가 깨졌다고 이야기한다. 다섯 명이 똑같이 나누기로 한 비스킷과 물은 새끼 여우 때문에 양이 줄었다. 앨런은 ‘새끼 여우가 우리보다 아프고 약하기 때문’에 더 줄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앤은 그걸 두고 질서를 어기는 행동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앤의 주장은 불길한 숫자 6이다. 새끼 여우가 오면서 아이들은 6명이 되었다. 숫자 6이 주는 공포는 생존을 앞둔 순간에선 단순한 불길함이 아닌 거대한 신념이 된다. 어른들은 늘 6을 피했고, 아이들은 그 말을 그대로 수용했다.
앤은 ‘우리가 여섯 명이기 때문에 어른들이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를 위해 하나가 희생하는 것쯤은 견뎌야 한다고 주장한다. 앨런을 뺀 나머지 아이들은 앤의 말에 동의한다.
뮤지컬 <머더러> 는 다소 무거운 주제와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극을 전개하는 방식은 발랄하고 희망적이다. 아카펠라 형식으로 구성된 넘버는 극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이야기의 전개상 꼭 필요하면서도 관객을 무장해제 시키는 앨런과 앤의 결혼식 장면은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가장 잊히지 않는 것은 힘없이 앉아만 있던 새끼 여우가 앨런 앞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다. 늘 팔로 무릎을 감싸고 쪼그려 앉아 있던 새끼 여우는 몸을 활짝 펴고 리듬을 따라 몸을 움직인다. 엄마를 그리워하던 앨런에게 건네는 그만의 언어로 느껴진다.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행동한다. 아이들만 있는 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어른다운 선택’은 부끄러움을 준다. 처음부터 자기 언어를 가지고 있던 앨런의 결정은 그래서 더 큰 여운을 남긴다. 뮤지컬 <머더러> 는 11월 17일까지 대학로 TOM 2관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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