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특집] 모호하고 평등한 에세이의 세계
<월간 채널예스> 2019년 9월호
작가로서 글을 쓰되, 독자로서의 나 역시 잊지 않을 것. (2019. 09. 04)
ⓒmelmel chung
내 직업은 에세이스트다. 에세이를 주로 쓰면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인터뷰를 하거나 강연도 한다. 이 모두를 아우르는 직업명으로는 ‘작가’라는 말이 가장 적당하겠다.
하지만 나를 ‘작가’라고 소개할 때마다 멋쩍어지던 시기가 있었다. 꾸준히 책을 써도 그 책이 팔리지 않으면 나는 ‘뭐 하는지 모르겠는 사람’이 됐고, ‘에세이 쓰는 사람은 등단한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작가라고 부르기 뭣하다’는 말도 들었다. 전업 에세이스트라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관둔 지 십 년이 다 돼 가는 예전 직업명으로 나를 부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게 다 내가 에세이를 쓰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에세이는 누구나 쓸 수 있다. 소설이나 시처럼 등단이라는 창구가 있는 게 아니고, 출판사 없이도 독립출판을 통해 저자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자의로든 타의로든 살면서 수십 편씩 쓰게 되는 게 에세이다. 영화나 책 감상문, 자기소개서, 각종 보고서 및 소셜 미디어에 올리는 짤막한 글도 일종의 에세이니까. 그래서인지 에세이는 잡글, 잡문으로도 불린다.
또 무엇이든 쓸 수 있는 게 에세이다. 딱히 법칙도 형식도 없으며, 길이도 상관없고 소재에도 제약이 없다. 쉽게 써도 되고 어렵게 써도 된다. 존댓말로 써도 되고 반말로 써도 된다. 결론을 내도 좋지만 안 내도 좋다.
게다가 주로 일상에 대해 쓰는 글이다. 에세이 쓰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제안한다. 일단 오늘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생각을 했고, 그래서 기분이 어땠다고 써보라고. ‘독자가 있는 일기 쓰기’라고 생각하면 시작하기가 조금 수월해진다. 나 역시 초고를 쓸 때마다 ‘나는 지금 일기를 쓰고 있어. 그런데 이 일기를 곧 누가 읽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말할수록 모호하게 느껴지는 장르인 만큼 종종 ‘소소한’, ‘얄팍한’, ‘개나 소나 다 쓰는’ 같은 단어와도 연결된다. 하지만 모호함이야말로 에세이의 주요한 매력이다. 누구나 쓸 수 있다는 점. 무엇이든 쓸 수 있다는 점. 그런 면에서 에세이는 모두에게 평등하다.
에세이는 평등하기에 독자의 취향을 존중한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글을 싫어하지만 어떤 사람은 글이 쉬우면 재미없다고 하고, 누군가는 긴 글이 읽을 맛 난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짧은 글이라서 읽기 편하다고 한다. 에세이는 이다지도 제각각인 사람들의 취향을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 서점을 잠깐 둘러봐도 마치 내 속을 옮겨 놓은 것 같은 에세이가 한 권씩은 꼭 있다.
그런 날은 있는 줄도 몰랐던 단짝을 처음 마주한 것처럼 가슴이 뛴다. 얼마 전에 접한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는 읽는 내내 인덱스를 하느라 포스트 잇이 남아나질 않았다. 일과 함께 살아온 여성이 펼쳐 보이는 차분하고 진지한 성찰이 과거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나를 여러 번 돌아보게 했다. 다 읽고 나서는 내 안에 힘없이 널브러져 있던 용기라는 성냥개비에 불이 착 그어지는 느낌이었다.
이십 대 때부터 극심한 통증을 일으키기 시작한 자궁에 의문을 품고 몸에 대한 탐구에 돌입한 사람의 이야기 『엄청나게 시끄럽고 지독하게 위태로운 나의 자궁』 도 빼놓을 수 없다. 작가의 충격적인 경험담에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또 다른 나의 비밀 일기를 읽는 것 같아 멈출 수가 없었다. 좋은 에세이를 읽을 때마다 실감한다.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용기 있는 한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을. 모든 개인적인 경험은 에세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에세이가 누군가의 사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에 공감하는 사람들만이 끝까지 책장을 넘기기 마련이라 읽다 보면 독자와 작가의 경계가 쉽게 허물어진다. 하지만 글을 쓸 때만큼은 그 중간에 머물려 한다. ‘작가로서 글을 쓰되, 독자로서의 나 역시 잊지 않을 것’. 내가 에세이를 쓸 때 가장 염두에 두는 부분이다. 시작은 쓰고 싶은 글이어야 하지만 다 쓰고 나서는 읽고 싶은 글이어야 한다. 한쪽으로 조금만 치우쳐도 아무도 이해 못 할 일기장 한 권이 나오고, 문장은 그럴듯하지만 의미 전달은 아쉬운 글 한 편이 완성된다.
나에게 묘한 패배감을 안겨주던 에세이는 어느새 가장 큰 힘을 주는 글이 됐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기에 겁 없이 시작할 수 있었고, 뭐든 쓸 수 있다는 생각에 이제껏 쓰면서 사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미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심정으로 또 다른 에세이를 찾는다.
이제는 누가 나를 작가로 부르든 말든 상관이 없고, 내가 진짜 작가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직업인으로서 에세이 쓰는 일이 즐겁고, 독자로서 에세이 읽기를 가장 즐긴다. 그래서 매일 어제보다 더 많이 쓰고 더 부지런히 읽고 싶다.
오늘 마음은 이 책김신회 저 | 오브바이포(Of by For)
때로는 시니컬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써내려간 일상과 그날의 마음으로 고른 책을 함께하다 보면 당신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져 있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인생책을 함께 읽는 기쁨 또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관련태그: 에세이, 작가,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경계
10여 년 동안 TV 코미디 작가로 일했고, 10년 남짓 에세이스트로 활동 중이다. 지혜로운 사람보다 유연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보다 게으른 사람에게 끌리지만 정작 자신은 지혜에 집착하고 쓸데없이 부지런한 타입이라 난감할 따름. 이런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날이 대부분일지라도, 스스로에게 정 붙이는 연습을 하며 사는 중이다.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오늘 마음은 이 책』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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