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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36화 : 도둑질한 돈이니 좋은 일에 써라

『마터 2-10』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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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철은 형의 도움을 받았다. 그가 활동비가 떨어지면 형에게 가서 얼마의 급전을 돌려 달라고 하면 일철은 아무 소리도 않고 십 원 때로는 오십 원도 건네었다. (2019. 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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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당시에 코민테른은 서신을 통하여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하여 지식인 중심, 파벌주의, 계급성의 결여, 사상의 혼잡성, 민중과 분리되어 있는 관념주의를 비판하며 조선공산당의 해산을 공식화했던 터였다. 따라서 신세대 활동가들에게 과거의 선배들과는 다른 활동노선의 전환이 운동의 임무와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지식인 사회주의자 몇몇이 모여 당 조직이라고 결성하여 선포하는 게 아니라, 매개 활동가들이 노동자 농민의 삶의 현장에 들어가 그들을 의식화하고 투쟁을 통하여 단련한 다음에 거기서부터 아래에서 위로 조직을 결성하여 당을 건설한다는 당연한 조직 방침이었다. 삼십 년대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형태의 활동은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고 만주에서는 민족주의계의 무장투쟁이 차츰 사라지고 사회주의 계열이 중심이 된 무장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일국일당주의 원칙에 따라서 중국에서 싸우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는 중국 당에 일본에서는 일본 당에 흡수되어야 한다고 정해졌고, 식민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조선 땅에서 당을 건설해야 하는 것이 목전의 시급한 임무가 되었다. 국권을 빼앗겨 식민지가 된 나라에서 혁명을 할 토대마저도 잃어버려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류재익은 일본에서 노동을 하면서 대학 전문부에 다녔고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에서 활동하다가 검거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기나긴 예심 기간 중에 형무소를 거쳐 가는 여러 활동가들을 만났고 이들은 조직의 기초를 미처 세우기도 전에 조선좌익노동자전국평의회니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니 조선반제동맹이니 하는 거창한 간판부터 세웠지만 실천 활동은 몇몇 문건이나 선언문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직 서로가 연결되지는 않았으나 전국 각 지방의 농촌 도시마다 이름 없는 사회주의 그룹들이 형성되어 수많은 소작쟁의와 노동쟁의를 끊임없이 벌이며 투쟁하기 시작한 것도 삼일운동 이후의 시대적 특징이었다. 류는 이들 헌신적인 활동가들이 서로 연결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조선에서 가장 가난하고 고통 받는 노동자 농민이면서 자신의 생존권을 걸고 투쟁에 나서는 민중들 속으로 찾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석방되자마자 감옥에서 알게 된 같은 또래의 몇몇 청년들과 함께 네 차례에 걸쳐 뿌리가 뽑혀버린 공산당의 재건을 위한 슬로건을 수립했다. 그들은 각자 역할을 분담하여 조직 구성에 들어갔다. 먼저 학생운동을 위하여 남녀 고보와 전문학교 대학 등을 전담할 구성원을 정하고, 경성과 영등포 인천 등지의 공장을 산별 부문으로 구분하여 전담자를 정했으며, 운동의 원칙과 방법론을 정했다. 최초의 역할 분담을 맡은 류재익을 비롯한 구성원이 중앙이 되고 이들이 각자 맡은 현장에서 만난 이들로 각자의 소그룹을 형성했으며 이 그룹의 성원들은 다시 각자 역할 분담을 통하여 하위그룹들을 만들어 냈다.


이 조직은 과거와 달리 아무런 명칭도 강령도 없었다. 다만 각 그룹들은 합법적인 책자를 읽으면서 차츰 중앙에서 내려오는 비합법 필사본이나 유인물을 읽었다. 그리고 각 그룹들은 서로 교류하거나 소통을 최소화했고 점 조직화 된 연락망을 통하여 중앙과 의견을 주고받는 방식이었다. 이들은 나중에 일제 검거가 시작되었을 때에 거의 이백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체포를 모면하고 현장이나 외곽에 잔존해 있던 구성원들이 그만큼 되었다고 본다면 오백여 명 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오백여 명의 대중적 활동가를 토대로 가진 조직은 능히 상부에 당을 재건할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의 원산이나 평양에서부터 황해도 평야지대의 일본인 대농장의 소작농들, 그리고 남쪽의 충청 전라도의 농민들과 광주 목포 부산 대구의 노동자들 사이에 스며들어간 사회주의 활동가들의 운동과 공공연하게 전국적으로 연계하는 것을 겸허하게 삼가고 있었다. 아직 연대투쟁을 벌일 단계는 아니었고, 최소한의 인적 교류를 통하여 누가 어디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 정도로 서로를 파악하고 있었다. 류재익을 비롯한 조선공산당 재건위 성원들은 경성을 중심으로 보다 알차고 탄탄한 조직으로 성장시키려고 하였다.


아무튼 일철이 그들과 우연히 접촉하게 된 때는 아직 초기였던 셈이다. 그들이 경성지역의 각급 학교에서 맹휴를 감행하고 공장들에서 최초의 연쇄적 파업을 일으켜 부분적으로 승리하거나 또는 검거되면서도 아직은 활동이 위축되지 않고 있던 기간은 거의 일 년 반쯤이었다. 일제의 치안당국은 전국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뭔가 불온한 기미를 알아채고 촉각을 곤두세워 내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일제는 정규 경찰 인력 외에도 조선인 출신의 보조원이나 밀정들을 대거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현장의 노동자들이거나 농민이나 빈민들 중에 활동하다 잡혀서 전향한 자도 있었고 처음부터 금품과 생활보장 때문에 정탐을 자원했던 자들도 있었다. 조직원들은 회합과 연락도 개별화 하였으며 서로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두 세 차례의 보안경로를 통과시킨 다음에 안전이 확인된 상태에서 서로를 만났다. 하부 구성원끼리는 상부의 지시만 받고 지정된 장소의 무인 포스트에 가서 문건을 수령하기도 했다.


이이철이 사나흘에 한 번씩은 인근 방우창의 일세 집에 들르곤 했는데 가끔씩 밥이라도 함께 사 먹거나 돈이 생긴 날은 막걸리도 마셨다. 사실 이철은 형의 도움을 받았다. 그가 활동비가 떨어지면 형에게 가서 얼마의 급전을 돌려 달라고 하면 일철은 아무 소리도 않고 십 원 때로는 오십 원도 건네었다. 


 “허어, 철도국 기관수가 잘나긴 잘났네!”


직업도 없이 일도 않으면서 큰돈을 건네받는 이철은 어쩐지 민망해져서 일부러 형에게 이죽거리면 일철은 덤덤하게 한 마디 했다.


 “그거 도둑질한 돈이니 좋은 일에 써라.”


이철이 방우창에게 찾아갔더니 그가 마침 마당에 나왔다가 다른 합숙방 노동자들이 여럿이 귀가하여 제각기 물 길어다 씻느라고 법석이어서 얼른 이철을 이끌고 나섰다. 


 “안 그래도 내가 자넬 찾아가려던 참이었다. 좀 급한 일인데 말이지.”


이렇게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이라도 중요한 이야기는 보행 중에 나누기로 되어 있어서 이이철과 방우창은 마루보시 앞을 지나서 철도 연변을 가로질러 샛강 제방 길까지 산책을 했다. 방우창이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상해에서 파견된 동지가 있는데 자네 중앙과 만나기를 원하고 있네.”


두 사람은 각자가 다른 연결점을 가진 사이라지만 또한 영등포의 노동자 조직에서는 같은 구성원이라서 신뢰하는 사이였다. 이철이 말했다.


 “문의하고 대답이 오면 알려주리다.”


 “시간이 별루 없는데. 내일까지 안 될까?”


 “이삼일 걸릴 텐데 하여튼 곧 연락할게요.”


이철은 방우창과 만나고 나서 노량진 전차종점까지 걸어가서 전차를 타고 문안으로 들어갔다. 동대문 창신동 근방에 이관수의 거처가 있었는데 바로 골목입구의 담뱃가게가 통신 장소였다. 이철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서 살피니 비좁은 가게 안쪽 작은방에 늘 앉아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담배 주십시오.”


 “뭐 장수연 드릴까요?”


 “아뇨 사쿠라 주세요.”


하고는 담배 한 갑을 집어 들면서 이철이 물었다. 


 “이씨 집에 있나요?”

 “가 보슈. 오늘 안 나갔을 테니.”


이철이 골목 안으로 들어가 비탈길 안쪽의 나무판자 문을 밀어보니 열려있었다. 문에 작은 쇠방울이 달려있어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집은 왜식 비슷하게 맞배지붕에 단순한 장방형 집인데 앞마당이 비좁아서 그냥 집 앞으로 길이 있는 모양새였다. 끝 쪽에 판자문 달린 이관수의 방이 보였다. 그가 비좁은 마당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판자문이 빠끔히 열리며 그가 내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대문에 매달린 쇠방울이 울릴 때부터 그는 살펴보고 있었을 것이다.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그는 손으로 직접 필사를 하던 중이었다. 각 소그룹들에 배포할 문건들은 등사하지 않고 모두 필사를 했다. 이철이 연락 사항을 전하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우리도 그가 누군지는 알고 있소. 그 사람들 들판에 콩 뿌리듯이 전국에 한두 사람씩 연결해 놓고 삐라나 문건 등을 살포하는 걸 활동으로 알지요. 지난번 파업 때에도 선을 대려고 하여 그쪽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잖소?”


 “예 기억하구 있습니다. 그때도 제가 연락해 드렸지요.”


 “내용은 비슷했어요. 해외에서 온 상당히 중요한 지위에 있는 국제선의 동지를 류 동지가 만나보라는 것이었어요.” 


 “그때 안 만나셨군요.”


 “물론이지. 류 동지는 우리끼리 의논하면서 이렇게 말하더군. 구체적인 투쟁 문제를 중심으로 만나려는 이라면 어떠한 동지도 좋지만, 한번 만나고 손을 떼는 것과 같은 소부르주아적 인물은 처음부터 만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의 말에 찬성했고.”


 “이번에도 만나지 않을 작정인가요?”


 “아니, 이번에는 아마 만나야 하지 않을까? 다른 조직들이 현장에서 자꾸 부딪치는데 연합을 하든지 조정을 할 시기가 왔다구 생각하네.” 


 이철은 궁금해져서 이관수에게 물었다.


 “그분이 누구인지 아신다구요?”


 이관수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그 사람 때문에 사찰이 심해지곤 했으니까. 삐라를 살포할 때마다 우리는 긴장했어요. 그는 우리들 선배 또래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오. 아마 김형신이라는 인물일 거요.”


그들은 문건을 만들어 북선 지방에는 우편을 통하여 보낸 다음 그 지역 조직원이 다시 등사하여 평양 인근 공장들과 평북의 광산 등지에 우편으로 송부했고, 전국 각지의 공장과 광산 신문지국 등에 발송하고 서울과 인천의 가두에서 수백 매를 살포했다. 기관지의 이름은 ‘코뮤니스트’였는데 내용은 반전투쟁의 전개, 쏘비에뜨 동맹의 사수, 중국 홍군과 쏘비에뜨의 옹호, 제국주의 전쟁을 일제에 반대하는 민족해방전쟁으로 전환할 것, 조선의 절대 독립 등이었다. 삐라 격문은 ‘일본의 만주점령에 반대하자!’는 것과 ‘붉은 5.1절’ 이라는 두 종류가 있었다.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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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석영(소설가)

「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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