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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희의 턱 : 책임의 무게
경청이 끝날 때까지 쉽게 움직이지 아니하고,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꺾이지 않는 결기
물론 감탄의 이유가 얼굴의 생김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2019. 07. 08)
<60일, 지정생존자>의 한 장면
넷플릭스의 <지정생존자>(2016~ )를 한국판으로 리메이크하면서 그 주인공으로 지진희를 세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얼떨결에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사람으로 지진희만큼 안도하고 믿을 만한 관상을 지닌 사람이 또 있을까. 스스로 “어릴 때부터 내 얼굴이 신뢰를 주는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같은 이야기도 내가 하면 사람들이 믿어줬다.”('지진희는 다 안다'. <아레나 옴므 플러스>. 2017년 12월호. 이경진 에디터)고 회고하는 지진희의 얼굴은, 보는 이들을 즉각적으로 안도케 하는 매력을 지녔다. 담백하고 깊은 눈매와 기복 없이 곧게 떨어지는 콧날, 단정하게 맞물린 입술은 마치 잘 쓰여진 주관식 문제의 정답을 보는 것 같은 시각적 쾌감을 선사하니까. 픽션의 세계 안에서, 지진희는 그 얼굴이 주는 신뢰를 무기로 활용하며 살아왔다. 그 신뢰에 전력으로 부응하거나, 혹은 그 신뢰를 뒤틀어 배반하는 방식으로.
물론 감탄의 이유가 얼굴의 생김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픽션의 세계에서 나와 사막을 걸었던 KBS 탐험예능 <거기가 어딘데??>에서, 탐험대장을 맡았던 지진희는 사람들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리더에 가까웠다. 탐험대가 걷기로 한 당일의 목표치를 채우기 위해서 끊임없이 대원들을 독려하고, 걸음이 느려진 대원들을 대신해 자신이 척후가 되어 먼저 잰 걸음으로 갈 길을 확인하고는 다시 돌아오는 일을 군말없이 반복하며, 자신이 내린 결정에 책임을 지고 밀어붙이되 대원들의 의견을 일단은 모두 경청하는 사람. 오만의 사막 한가운데를 걸어서 종단하는 쉽지 않은 도전에도 시청자들이 프로그램을 편하게 볼 수 있었던 건, 지진희가 스스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내리고 이를 힘있게 추진할 수 있는 사람임을 끊임없이 행동으로 증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대통령을 포함한 국무위원 전원이 테러로 사망하는 초유의 사태가 터진 상황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장관이 지진희의 얼굴을 하고 있는 박무진이라면, 보는 사람도 절로 안도하지 않겠나.
tvN <60일, 지정생존자> 속 박무진은 실제 지진희보다는 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백면서생에 가깝다. 그렇다고 만만하게 봐도 좋은 사람은 절대 아니다. 박무진은 다른 누구에게 강압적으로 윽박지를 카리스마나 정치적 계책을 꼼꼼히 짜는 생존본능은 없지만, 주변의 의견과 정보를 두루 살피는 합리성과 그 결과로 자신이 내린 결론을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강단을 지니고 있다. 박무진은 대통령이 직접 내린 오더도 학자적 소신을 이유로 직을 걸고 항명했고,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미국과 일본의 주장에 섣불리 흔들리는 대신 주변의 정보를 모두 취합할 때까지 확답을 삼간다. 입을 떼기까지 숙고하고 경청한 뒤, 한번 턱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뜻을 꺾지 않고 앞으로 꿋꿋이 전진하는 사람. 맞다. 책임을 지는 자리에 가 있는 사람의 턱이란 그렇게 무겁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박무진이 그러하고, 그를 연기하는 지진희가 그러하듯이.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