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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연못에서

안식처 하나쯤은 두고 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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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을 누리고 동경할 수 있는 나의 안식처, 나의 연못을 품게 된 후, 나는 풍요로워졌다. (2019. 07.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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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시간이 되면 도시락이나 간단한 먹을 거리를 사 들고 회사를 나선다. 내 걸음의 종착지는 여의도 공원의 작은 연못이 될 테지. 이상하게도 자꾸만 생각이 나는 곳. 이곳에만 오면 나는 강호한정과 안분지족을 노래했던 윤선도가 되는 것만 같다. 보길도에 반해 그곳에 집을 짓고야 만 윤선도는 될 수 없지만, 여의도 회사원의 분수에는 딱 제격인 나의 작은 연못. 이곳에 가기 시작한 뒤로 회사 생활이 한결 여유로워진 것 같다.


볕이 예쁘게 드는 날은 더할 나위 없고, 여우비가 내리는 날에는 촉촉한 운치를 품고 있으며, 요즘과 같은 여름의 초입에는 연꽃이 피어 한없이 연못을 바라보게 만든다. 늘 꿈 꾸는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이 생각 나기도 하고, 12시 30분이 되면 흐르기 시작하는 냇물 소리는 어느 계곡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기도 한다.

 

산수간 바회 아래 띠집을 짓노라하니
그 몰른 남들은 웃는다 한다마는
어리고 햐암의 뜻에는 내 분인가 하노라

잔들고 혼자안자 먼뫼흘 바라보니
그리던 님이오다 반가옴이 이리하랴
말씀도 우움도 아녀도 몯내 됴하하노라

누고셔 삼공도곤 낫다하더니 만승이 이만하랴
이제로 헤어든 소부 허유 냑돗더라
아마도 임천 한흥을 비길 곳이 업세라
-윤선도, 『만흥』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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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에 가기 위해서는 회색에서 초록으로의 색 변화를 눈으로 맞이하게 된다. 회색 빌딩들을 헤치고 여의도 공원에 도착하면, 파란 하늘과 갖가지 꽃, 흙, 그리고 나무가 보인다. 그러다 연못 입구에 닿으면 초록으로만 덮인 숲이 펼쳐지고, 걷다 보면 숨겨진 정원이 펼쳐진다. 이곳을 발견하게 된 것은 아마도 초록으로 뒤덮인 어느 곳을 찾아 헤매던 나의 간절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파란 하늘 밑의 초록 나뭇잎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를 들으면 벅차 올랐다. 소름이 돋기도 했다. 길을 걸을 때면 이어폰을 늘 끼는 나인데, 이곳에선 새 소리를 들으려 이어폰을 뺀다. 온전히 초록을 누릴 수 있는, 초록을 동경할 수 있는 나의 안식처에서.


안식처 하나쯤 품고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온 방식을 흔들어 놓기도 하는 것이었다. 본디 반복된 무엇을 쉽게 질려하는 편이어서, 집에 가는 길도 다른 루트를 만들어서 가는 사람이니까. 매일 같은 장소에 가기 위해 같은 길을, 같은 시간에 걸어가는 규칙적인 삶이란 나다운 것은 아니었다. 반복되는 무엇 속에서 행복을 느끼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규칙적인 건 재미 없다는 게 나의 상식이었으니까. 지금은 이곳에서 먹을 도시락을 준비하는 시간부터 설렌다. 매일 같은 곳에 가지만 이곳은 늘 새롭다. 이 모든 걸 행복해하는 나를 보는 것도 새롭다. 그래서 내 속을 스스로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 넓지도 않은 여의도 공원이건만, 나의 작은 연못을 발견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간 나의 점심 시간은 맛있는 걸 먹고 커피를 사 들고 와서는 수다를 떠는 것이 전부였다. 바깥 음식이 지겨워질 무렵, 도시락을 싸 오면서 같이 먹던 친구들과 밥을 따로 먹게 되었고, 점심에라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점심 산책을 시작했다. 여의도 공원을 다양한 루트로 걸어 다녔다. 하루는 왼 편, 하루는 오른 편, 하루는 여의나루까지. 매일 루트를 바꾸어 다니는 재미가 있었다. 그 즈음 초록의 입구에 이끌려 이 연못에 처음 발을 딛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루트를 바꾸어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연못은 내 일상이 되었다.

 

어떤 것, 어떤 사람이 내 일상으로 건너온다는 건 나를 채워주는 의미이기도 한 걸까. 일주일에 두 번의 저녁 수영, 수영 후의 킥복싱, 수요일의 오케스트라 연습, 그리고 나의 연못에 들르는 일. 매일 연락하며 내가 힘을 내게 해 주는 사람들. 이들이 내 일상이 된 후의 나는,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주었다. 나는 내가 누릴 것들을 최선을 다해 누리고, 생을 채워가고 있다고.

 

대학 시절의 내가 그립긴 하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채워지지 않은 상태의 나는 방황하기 일쑤였다. 취미는 딱히 없었고, 누가 부르면 부르는 대로 나가 놀았다. 스스로 판단이 서지 않아 끊어야 할 관계도 모르고 정에 이끌려 여러 사람들을 만나기만 했다. 한 번 더 생각하지 못하고 그때 그때 끌리는 대로만 살았다. 물론, 그 시절의 나는 그렇게 무너진 채로도 사랑스럽다. 무너져보는 것도 그 나이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을 테니까. 던져진 대로 살았던 내가 있기에 지금의 일상을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럴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는지? 음…… 나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한 번 산 시간은 한 번으로 되었으니까. 아무리 젊고 찬란한 때가 있었다고 해도 그 시간을 건너오기까지도 꽤나 힘이 들었다. 뭐. 하룻밤 정도야 괜찮겠지. 내가 어떻게 현재의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돌아가고 싶은 때는 없어도 지금의 이 물리적인 나이에는 머물고 싶다. 지금까지 익히고 배우고 깨닫고 아는 그대로. 그러면 어제의 나보다는 낫지 않을까.


시간은 흐르는데 더 나은 인간이 되기는커녕 예전보다 못한 내가 될까 봐 겁난다. 그래서 느리게라도 계속해서 읽고 생각하고 듣고 보고 쓴다. 일단 멈춘다면 예전보다 못한 내가 될 게 뻔하니까. 시간은 앞으로 간다. 우리는 분명히 지금보다 늙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이 시간을 명백히 살아내야 한다. 나는 나답게 당신은 당신답게.
 -조경란,  『소설가의 사물』  중

 

힘든 것을 털어낼 무엇을 지닌 사람들은 그래서 매력적으로 보이나 보다. 어떤 노래, 사람, 물건, 운동 등 무엇이더라도. 털어낼 줄 안다는 건 본래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내가 있어야 할 곳, 나의 자리, 나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일 테니까. 더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누군가의 노력은 그래서 일상을 보면 드러나기 마련이다.

 

다행이다. 지금의 내가 나를 아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어서. 복잡한 마음이 들 때면 안식처를 찾아 떠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해서. 쌓아두지 않고 털어내는 사람이어서. 자꾸만 가고 싶어 지는, 마음이 향하는 장소를 둔다는 게 이렇게나 든든해졌다. 살아가는 동안 이 안식처를 여러 곳에 둘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장소들은 모여서 나를 채워 넣을 것이고, 그 순간을 누렸던 기억들은 나를 수시로 깨워줄 거라 믿으니까.

 

나에게 안식을 가져다 주는 곳이 도처에 있을지도 모른다. 꽉 잡힌 마음으로 살고 있다면, 무언가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 지 오래 되었다면 마음이 잡아 이끄는 대로 무작정 걸어보면 어떨까. 안식처 하나쯤 마음에 품고 사는 삶은 생각보다 더 풍요로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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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나영(도서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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