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이정은의 순하고 흔한 얼굴 : 흔한 표면 밑에 도사린 개별의 서사들

서사의 변두리에서도 언제나 표면에 균열을 내는 배우의 괴력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모난 곳 없이 둥근 얼굴과 순한 인상 덕에, 이정은은 어디에 어떤 캐릭터로 가져다 두어도 이질감 없이 녹아 드는 배우다.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어디에나 있는 탓에 그 어느 곳에서도 주목받지 못하는 중년 여성 노동자의 얼굴에 가깝다. (2019. 06. 10)

1.jpg

            영화 <우리지금만나>의 한 장면

 


* 영화 <기생충>(2019)과 <우리 지금 만나 >(2018)의  경미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생충>의 예고편에서 문광(이정은)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1차 예고편과 2차 예고편을 다 합쳐도 그의 분량은 7초 남짓에 불과하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은 모두 입을 모아 이정은을 이야기한다. 대외적으로는 신흥부자 박사장(이선균)네 가족 안에 몰락한 중산층 기택(송강호)의 가족이 침투해 들어간다고 알려진 영화지만, 두 가족이 직접 만나기 위해서는 박사장네 집에 상주하는 가사도우미 문광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벨을 누른 기우(최우식)의 신원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는 것도 문광이고, 박사장네 부부보다 그 집의 역사를 더 오래 알고 있는 것 또한 문광이다. "생긴 건 둥글둥글한데 속은 아주 능구렁이야." 기정(박소담)의 말처럼, 문광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인물이다. 극과 극의 두 가족이 충돌하는 <기생충>의 서사 한 가운데에, 그 모든 변곡의 중심에 문광이 있다.

 

 

2.jpg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모난 곳 없이 둥근 얼굴과 순한 인상 덕에, 이정은은 어디에 어떤 캐릭터로 가져다 두어도 이질감 없이 녹아 드는 배우다.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어디에나 있는 탓에 그 어느 곳에서도 주목받지 못하는 중년 여성 노동자의 얼굴에 가깝다. 그래서 이정은은 보는 이들의 시야에 쉽게 침투하면서도, tvN <미스터 션샤인>(2018)의 함안댁 정도를 제외하면 자신이 맡은 배역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그 흔한 인상 뒤에 이정은은 늘 묵직한 한 방을 숨겨두고 있었다. 카르푸-홈에버 투쟁을 다룬 영화 <카트>(2014)에서 이정은의 배역이름은 ‘계산원1’이었지만, 집단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직원들 중 제일 처음으로 ‘점장이 직접 나와서 설명하라’고 외치고 ‘최소한 계약기간은 채워야 할 것 아니냐’고 말한 인물이었다. JTBC <눈이 부시게>(2019) 속 정은 또한 혜자(김혜자)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그 모든 비밀을 담담한 표정으로 껴안은 강인한 인물이었다. 등장에서 퇴장까지 2분 남짓한 시간 동안 유머에서 공포 사이를 오가게 만든 <미성년>(2019) 속 ‘방파제 아줌마’는 어떤가? 한국사회가 가장 쉽게 무시하는 집단인 ‘아줌마’들에게 모두 저마다의 개성과 자아가 존재하듯, 이정은은 대명사의 배역 이름을 받고도 그 모호함을 훌쩍 뛰어넘는 독자성을 표현해 왔다.
 
서사의 변두리에서도 언제나 표면에 균열을 내는 역할을 맡아온 이가, 처음으로 온전히 자신의 서사를 지니면 어떤 에너지를 보여줄까? 옴니버스 영화 <우리 지금 만나>의 세 번째 에피소드인 부지영 감독의 <여보세요>에서, 이정은은 식당 노동과 청소노동을 병행하며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간병하는 여성 노동자 ‘정은’ 역으로 첫 단독주연을 맡았다. 남한으로 내려온 아들을 찾기 위해 중국 휴대폰으로 몰래 건 북한여성(이상희)의 전화가 정은의 번호로 잘못 도착하면서, 묵묵히 일만 하던 정은의 삶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문광이 선사한 충격이 가시지 않은 관객이라면, 이정은의 인도를 믿고 <우리 지금 만나>를 보러 가도 좋을 것이다. ‘아줌마’라는 집단명사로 축약된 채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는 중년 여성 노동자들의 얼굴 뒤에 숨겨져 있던, 구비구비 접혀진 개별의 서사를 만날 수 있을 테니.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이승한(TV 칼럼니스트)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

오늘의 책

트럼프의 귀환, 위기인가? 기회인가?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거머쥔 트럼프. 글로벌 무역 질서를 뒤흔들 트럼프 2기 정부의 명암과 미국 우선주의 정책이 국제 정세에 미칠 영향에 대해 설명하는 박종훈 저자의 신간이다. 강경한 슈퍼 트럼프의 시대에 직면한 대한민국이 어떠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지 그 전략을 제시한다.

이래도 안 읽으실 건가요

텍스트 힙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독서가 우리 삶에 필요해서다. 일본 뇌과학계 권위자가 뇌과학으로 입증하는 독서 예찬론. 책을 읽으면 뇌가 깨어난다. 집중력이 높아지고 이해력이 상승하며 즐겁기까지 하다. 책의 장르는 상관 없다. 어떤 책이든 일단 읽으면 삶이 윤택해진다.

죽음을 부르는 저주받은 소설

출간 즉시 “새로운 대표작”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 관련 영상을 제작하려 하면 재앙을 몰고 다니는, 저주받은 소설 『밤이 끝나는 곳』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등장인물들이 함께 떠난 크루즈 여행 중 숨겨진 진실과 사라진 작가의 그림자가 서서히 밝혀진다.

우리 아이 영어 공부, 이렇게만 하세요!

영어교육 전문가이자 유튜브 <교집합 스튜디오> 멘토 권태형 소장의 첫 영어 자녀 교육서. 다년간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초등 영어 교육의 현실과 아이들의 다양한 학습 성향에 맞는 영어 학습법을 제시한다. 학부모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지침과 실천 방안을 담았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