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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바르다 : 결국 유작이 된 내 영화

바르다 감독의 목소리는 특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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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바르다였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봉주르, 인사를 건넨 감독님의 목소리는 영화 속 내레이션 그대로였다. (2019. 0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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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의 한 장면

 

 

감독님 영화는 음악적이니까요

 

퐁피두 센터 옆 스트라빈스키 분수 앞에서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손목시계를 잘못 보고 나와 약속 시간이 넉넉히 남아 있었다.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쉿! 제스처를 취하는 달리의 얼굴 아래 형형색색의 높은 음자리표와 입술, 하트 등의 구조물이 놓인 분수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달리의 얼굴을 등지고 걷다가 언뜻 무늬 없는 검은 문이 눈에 띄었다. 갤러리였다. 사진과 설치 작품이 창 너머로 여럿 보였다.

 

2층 계단에서 내려오는 이의 모습이 무척 익숙했다. 아녜스 바르다였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봉주르, 인사를 건넨 감독님의 목소리는 영화 속 내레이션 그대로였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다큐에 담긴 현실은 언제든 진짜 현실과 만날 수 있지. 영화를 했어?” “피아노를 쳤다. 지금은 영화 잡지에 글을 쓴다.” “평론가겠네?” “주로 인터뷰를 한다.” “어떤 매체인가?” “한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종이 영화 주간지다.” “종이책이나 잡지가 점점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어. 슬프지만 자본주의 논리가 그렇지. 상품으로서 경쟁하고 소모되고 규격에 안 맞으면 상품 취급도 안 해. 내 하트 모양 감자들처럼. 관객수랑 수익은 얼마, 숫자 놀음에 질려서 상업영화와 작별을 고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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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의 한 장면

 

 

잠시 침묵하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감독님 영화는 음악적이니까요. <낭트의 자코>는 마지막에 흐르는 바흐 칸타타 147이랑 결이 같아요.” 죽음을 앞둔 남편 자크 드미의 얼굴을 카메라가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느리게 따라가는 장면들을 떠올렸다. 아마 그의 속눈썹을 세어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느릿함은 삶과 예술의 동반자인 남편을 필름에 담아낸 그녀가 지닌 진실이었다.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시간을 영화에서나마 늦추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바흐 칸타타 147 <주는 인간의 소망, 기쁨>은 이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나직하지만 통렬하게 우리를 뒤흔든다.

 

“영화의 여운에 사로잡혀 한동안 이 칸타타의 피아노 편곡 버전을 쳤다.”라고 말하자, 바르다 감독은 가만히 내 소매를 끌었다. 자신의 오래된 필름으로 만든 구조물 안, 해바라기 화분을 놓은 작품, 쿠바와 중국에서 찍은 흑백 사진들…. 기억을 복기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녀의 목소리가 더 또렷하게 떠오른다.

 

바르다 감독의 목소리는 특별했다. 표현들도 그랬다. 추상적이고 긴 단어를 전혀 쓰지 않는 간명한 문장이었지만 온몸으로 뜨겁게 삶을 살아낸 사람만이 갖는 단단한 진실이 깃들어 있었다. 체온처럼 따뜻한 기운도 서려 있었다. 그 덕에 마치 수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를 만나 이야기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내 불완전한 문장으로는 그 목소리를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순간 마법처럼 확 줄어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녹음을 하지 않았으니 나 혼자만 들은 이 목소리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나는 지금 문장으로 최대한 그 순간을 기록하려 애쓰고 있다. 쓰지 않는다면 이 목소리는 내 기억 속에서 흐려지다 결국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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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의 한 장면

 

 

목소리는 가장 진실된 거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설령 불완전할지라도, 기록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말이다. 바르다 감독이 60년대에 직접 인화한 사진 앞에서 멈췄다. “사진에 매료된 건, 거의 수공예처럼 손으로 직접 만지고 손끝에서 만들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이지. 지금이야 디지털로 찍으면 그만이지만 40년대 카메라는 이렇지가 않았어. 까마득한 옛날인데 엊그제 같네. 네모난 상자에 렌즈도 두 개 달린 카메라였거든. 그걸 위에서 내려다보며 찍는데, 필름을 끼우고 나중에 현상하고 인화하는 것까지 사진가의 일이었어. 모든 단계에서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게 많았어. 아주 미세한 차이로도 공예품 만들듯 결과물이 달라져. 손끝에서 내가 진짜 표현하고 싶은 이미지를 하나씩 만들 수 있었지.”

 

롤라이플렉스만 쓰는 사진작가를 안다고 말하자 그녀가 반가워했다. “이십대 초반 파리에 와서 중고 카메라를 덜컥 샀는데,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직접 부딪히면서 무작정 찍고 그냥 몸으로 직접 배웠어. 얼마쯤 책으로 공부도 했지만 이론과 찍는 거랑은 다른 일이니까. 필름이 귀해서 한 컷마다 많이 고민했지만 망친 사진들이 더 많았어. 형편없었지. 사진을 이해하고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다루기까지 직접 부딪히는 시간, 흠과 오류투성이의 시간이 필요해. 흠과 오류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망친 사진에서 더 많이 배워.” 흠집 나는 걸 두려워할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더 어린 날의 내가 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혹시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도 불러? 진짜 내 꿈은 가수였어. 클레오(<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의 주인공)도 가수잖아. 내가 가수가 못 되었으니 영화 속에서라도 주인공을 시켜주고 싶었어. 시나리오 쓸 때부터 그렇게 정했고 제작자가 뭐라든 절대 바꿀 마음이 없었지.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에서도 영화의 메시지는 주인공이 부르는 노래에 다 담겨 있지. 목소리를 악기처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게 세상에서 제일 근사한 거 같아. 불행히도 나는 노래를 못 불러. 대신 목소리로 뭔가를 표현하려고 내레이션을 많이 했지. 내레이션을 하면 내 목소리를 도구로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잖아. 목소리는 가장 진실된 거니까, 표정이나 몸짓은 꾸며도 목소리는 꾸밀 수가 없어. 영화가 허구일지라도 결국 그것이 전달하는 건 어떤 진실이고, 영화에는 삶의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에 위대한 예술인 거야. 내 영화는 다큐이면서 동시에 픽션이기도 해. 내가 편집을 하면서 의도를 가지고 했고, 내레이션으로 서사를 만들듯 이야기를 끌고 나가니까. 우리의 삶이 담긴 현실과 이야기의 세계는 아주 가깝게 맞닿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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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의 한 장면

 

 

그녀가 꺼내놓는 진실 앞에 나 역시 솔직해져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사실 나는 시네필이 아니고 영화를 많이 보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시네필이 아니면 어때. 나도 영화를 많이 안 봐. 영화를 만들거나, 사진을 찍거나, 그리고 오리고 붙이고 만들거나 하지. 그게 뭐 어때서? 영화 너머 진짜 사람들, 세상을 보는 게 더 중요해. 오로지 영화만 보고 영화만 알고 그 좁은 세계에 갇혀 시야가 더 좁아질 수도 있어. 내가 처음 영화를 하겠다고 했을 때, 몇몇 시네필들이 지난 걸작들을 챙겨 보지 않은 나를 무시했어. 나한테 자격이 없다고도 했어. 영화를 만들고 말고를 영화를 몇 편 봤나로 결정해야 한다는 듯이 말야. 그땐 극장에 간다는 게 아주 대단한 일이었거든. 몇몇은 응원해주었고, 자부심이 지나친 몇몇은 내가 영화를 모른다고 하더라. 그들은 소리 없이 사라졌어. 나는 영화감독이 되었지. 응원했던 시네필들은 계속 동료로 만났어. 인생이 참 신기해. 상업영화의 경쟁에서 벗어났을 뿐, 나는 한 번도 쉰 적이 없어. 계속 영화를 만들고 사진을 찍고,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 왔어. 그러다 지치면 해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지. 나는 그냥 똑같이 하던 걸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상을 주는 거야. 나더러 선구자래. 첫 영화를 만들 때에는 갑자기 나타난 웬 여자애였는데 65년이 지나니까 선구자라니! 믿어져? 중요한 건 끝까지, 쉼 없이 순리대로 계속 나아가는 거야. 내 영화를 한 편 더 하려고 해.”

 

바르다의 진실된 목소리로 구성된 “내 영화”는 결국 유작이 되었다. 그 마지막 영화가 곧 서울에서 개봉을 앞두고 있다.  

 

 

 

‘김나희의 음악적으로’ 연재를 시작하며

 

시간은 과연 직선일까? 과거로부터 흘러와 현재를 지나 미래를 향해 가는 걸까? 어떤 과거는 늘 현재로 남아 있다. 성장하는 생명처럼 현재가 훌쩍 자라나 미래를 향해 힘껏 달려가기도 한다.

 

예술적 체험이라고 뭉뚱그릴 수 있는 기억-혹은 예술가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과거와 현재, 미래에 걸쳐진 음각 판화처럼 남아 있다. 내면에 축적된 체험과 기억들은 한 뼘씩 뻗어 나가며 서로 맞닿아 확장된 공간을 차지해 나간다. 잔뜩 헝클어진 채 흩어진 그것들을 연재를 통해 하나씩 꺼내볼 생각이다.

 

2013년 5월 29일은 스트라빈스키가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봄의 제전>을 선보인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 마린스키 발레가 선보인 복원된 니진스키의 춤이 스트라빈스키의 리듬을 타고 날아와 칼날처럼 피부 아래에 꽂혔다. 한 세기를 기다린 걸작을 마주한 그날의 경험 덕분에, 나는 담아낼 수 없는 것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도시에 가든 극장에 갔으며, 온 힘을 다해 귀 기울이고, 보고, 온 감각을 활짝 열어 한껏 눈앞에 놓인 것을 느꼈다. 그 순간의 벅찬 감동을 기념해 5월 29일 연재를 시작한다.

 

그간 숱한 지면에 원고를 보내면서 다 담아내지 못한 소소한 이야기들이지만, 공들여 담아내 정돈하듯 제자리에 놓아준다면, 어딘가에 가닿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어디에 있는 누구든 말이다. 이 이야기들이 가닿는다면, 음악이 그러하듯 깊고 진실하게 전달되기를, 음악적이기를, 모든 것이 다 음악이었던 시절을 지나왔으나 내 불완전한 문장이 ‘음악적’이라는 단어에 걸맞기를 간절히 바란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1Disc)아녜스 바르다 감독 | 아트서비스
55살 나이차가 무색할 만큼 남다른 케미를 보여주는 아녜스 바르다와 JR. 포토트럭을 타고 프랑스 곳곳을 누비며 마주한 시민들의 얼굴과 삶의 터전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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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나희(클래식음악평론가)

파리에서 피아노와 법학을 공부했다. 새롭고 아름다운 것을 접하고 글로 남긴다. 바흐와 말러, 바그너, 피나 바우슈를 위해 지구 어디든 갈 수 있다. 인터뷰집 <예술이라는 은하에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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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회 아카데미시상식 장편 다큐멘터리상 후보 제70회 칸국제영화제 골든아이상 수상 제42회 토론토국제영화제다큐멘터리 관객상 수상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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