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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4화 : 마른 나뭇가지에 움튼 순에서

『마터 2-10』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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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오는 차츰 지상에서의 현실의 시간을 벗어났고 굴뚝의 일상은 이미 현실이 아니게 되었다. (2019. 0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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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마른 나뭇가지에 움튼 순에서 연둣빛 어린 떡잎으로 자라나고 쑥쑥 커진 잎사귀들은 녹색이 짙어지고 햇빛에 윤이 나면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진오의 굴뚝 위 일상은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곧 담판이 있을 거라더니 초여름으로 접어들면서 회사 측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금속노조에서 가끔씩 주말마다 회사 본부 빌딩 앞으로 몰려가 확성기를 틀어놓고 플래카드 펼치고 시위를 해댔지만 의경들 스무 명 남짓이 주위에서 지켜볼 뿐 회사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굴뚝 농성 백일 기념 시위도 조용히 지나갔다. 회사에서 돌아오는 말은 한결같이 현재 소유주가 분명치 않아서 회사를 넘겨받은 측이 경영진을 구성한 뒤에야 이전의 해고나 노조 문제를 협의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노동자를 해고하고 회사를 매각한 뒤에 해외로 공장을 옮기고 현지에서 노동자를 고용하여 다른 회사로 탈바꿈하는 뻔한 꼼수가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진오와 동료들은 누가 소유주가 되건 요구 조건은 변함이 없음을 굳게 결정하고 있었다. 농성은 이제 겨우 시작인 셈이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몸 풀고 세 동작으로 근육 단련을 한 뒤에 난간 주위를 왕복했다. 모종판에 구멍을 내어 상추 씨 두세 알갱이를 넣었더니 사나흘 만에 떡잎이 나왔고 이십 여일이 지나자 제법 손가락 길이의 잎이 서너 장 자라났다. 이진오는 그것들 중에 제일 싱싱해 뵈고 모양 좋게 잘 자란 모종을 뽑아 반으로 자른 페트병 화분에 셋씩 옮겨 심었다. 그는 이런 화분을 다섯 개 가지고 있었다. 흙은 부근 꽃집에서 작은 포대에 담아 파는 것을 최군이 구해다 올려 주었다. 아침저녁으로 올라온 식수를 화분에 뿌려주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잎사귀와 줄기와 흙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하얗고 작은 벌레 몇 마리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아마도 흙 속에 원래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먼지보다 더 작아서 움직이지 않았다면 발견할 수도 없는 이런 미물도 열심히 살아간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것들에게 하루란 얼마나 긴 시간이 될까.


점심밥이 올라올 무렵부터 서쪽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검은 구름이 몰려왔다.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고 점심 바구니를 내려주고 나자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진오는 우선 난간 바깥쪽에 두른 두꺼운 텐트 자락이 잘 동여 매어져 있는지 점검하고 안쪽에 겹쳐 두른 하우스용 비닐 자락도 여며두었다. 그리고 맨 구석의 개인용 에이텐트는 난간과 굴뚝 안쪽 나사에 묶은 끈들을 하나씩 당겨보기도 했다. 화분을 비닐 자락 안으로 바짝 끌어다 놓았고 운반용 도르래와 물건들을 넣어둔 플라스틱 박스나 어쨌든 밧줄에 묶인 것들은 다시 몇 겹으로 단단히 조여 맸다. 비가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하자 그는 우비를 입고 모자까지 썼다. 비가 온다고 비좁은 텐트 속으로 들어가서 처박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도 있고 비 오는 날도 있고 폭풍이 몰아치는 날도 있기 마련이다. 춥거나 덥거나 하여튼 날씨란 별것이 아니었다. 지루하고 화딱지 나고 시시껄렁하고 슬프고 기쁘고 하는 마음의 변화 또한 하루 낮 하룻밤이면 지나가 버린다.


올라온 저녁밥을 텐트 안으로 상반신만 들이밀고 먹었다. 우비의 모자에서 떨어진 빗물이 밥과 찌개 위로 흘러내렸다. 밥 바구니를 내려주고 난간을 오락가락하며 걸었다. 비가 줄기차게 내렸고 쉽게 그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는 여느 때보다 천천히 걸음을 떼어 놓으며 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그는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상상해 보았다. 그렇지 않은가. 이곳은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다. 여기는 사람이 거처하는 공간이 아니다. 이 좁은 원둘레는 지상의 일상과 시간을 벗어난 우주선의 조종실 같은 곳이다. 그는 죽지 않고 여기 살아있으나 세상은 그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남들에게는 언젠가 돌아올 여행 중에 있는 사람과 같았다. 아내조차도 그와 통화를 할 적에는 해외에 있는 사람에게 측근들의 소식을 전하듯 말했다. 이진오는 차츰 지상에서의 현실의 시간을 벗어났고 굴뚝의 일상은 이미 현실이 아니게 되었다. 


샛말에서는 언제나 저녁 무렵이 활기가 차오르는 시간이었다. 주변의 수십 개 공장에서 쏟아져 나온 노동자들이 길을 메웠고 철도 공작창과 피혁 제지 공장 등에서 퇴근하는 사람들의 자전거가 길을 메웠다. 방직공장의 여공들은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 울긋불긋한 사복차림이 되어 귀가하거나 기숙사 거주자는 외출을 나왔다. 아낙네들은 집 앞 길가에 갈탄 화로를 내놓고 풍구질을 하며 생선을 구웠다. 가장들은 빈 점심 도시락을 자전거 핸들에 매달고 유유히 샛말 중앙통으로 들어섰다. 도시락 속에서 젓가락이 부딪치는 소리가 달그락거렸다. 자전거도 한두 대가 아니어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같은 시각이 되면 먼 데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아버지나 형이 돌아온다는 걸 알아채고 큰길가로 달려나가곤 했다. 전쟁 직후에는 거의 모든 공장이 파괴되어 한산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예전의 큰 공장들은 복구를 마치고 새로운 공장들이 빈터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반파된 제분공장이나 벽돌공장 등지에서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학급을 나누어 수업을 받았고 학교가 복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진오는 길가에 서서 동네 아저씨들이 일터에서 돌아오는 광경을 바라보다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 윤복례는 아직 시장에서 돌아오지 않았지만 할머니 신금이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엄마는 아침을 준비해놓고 영등포 시장 옷가게로 나가 가게 문을 열고 좌판을 내놓았고 할머니가 시장으로 나가면 돌아와 남편 이지산과 큰할아버지께 밥상을 차려드리고 점심까지 준비해 놓고는 가게로 나갔다. 할머니는 그 길로 집으로 돌아올 때도 있고 물건이 들어오거나 손님이 많은 날에는 저녁때까지 며느리와 함께 있다가 저녁때 장을 보아 가지고 돌아오곤 했다. 이때 장바구니에는 찬거리만 있는 게 아니라 진오의 군것질거리가 들어있었다. 단팥빵이거나 눈깔사탕이거나 절편 떡이거나 하여튼 할머니는 그런 주전부리를 진오를 위해 빼놓은 적이 없었다.


큰할아버지 이백만이 일정 때 퇴직하고 지었다는 마당 앞 별채는 작은 수공업 공장이었다. 이백만은 소년 시절에 금속 공방의 조수 일을 배운 적이 있었고 철도국에 취직해서 본격적으로 선반 일을 배운 뒤에 집어치웠지만 늘 취미 삼아 집에서 작은 물건들을 만들곤 했다. 그는 스스로 이게 잔일이지만 아무나 못하는 쟁이의 솜씨라야 한다고 은근히 자기 재주를 자랑했다. 마누라에게도 그리고 며느리 신금이에게도 자잘한 넝쿨무늬가 새겨진 은반지를 만들어 주었고 비녀도 만들어 주었다. 세태 풍속이 바뀌기 전까지 여인네들은 시집갈 때 농이며 반닫이를 해가곤 했는데 나무 위에 온갖 예쁜 장식이 붙기 마련이었다. 자개장롱은 부잣집 새댁의 차지였지만 대개는 수수하고 담박한 목제 장롱이나 함이나 잡다한 살림은 온갖 금속 장식을 붙이고 박아야 물건이 완성되었다. 큰할아버지 공방에 들어가면 강력한 불이 나오는 코크스 풍로가 있고 납 녹이고 아교 태우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큰할아버지가 다루는 것은 흑철, 주석, 놋쇠, 철에 아연 올린 백철, 구리, 납, 금, 은, 금박 은박 등속이었다. 온 세상의 쇠라는 쇠는 모두 다루었고 거기에다 황소 뿔을 얇게 펴서 색칠한 장식품이며 빗이며 장도칼까지 주문받는 대로 다 만들었다. 큰할아버지의 물건만 받아쓰는 목공소에서 그 장식들을 목재 살림가구에 붙이고 박아서 시장에 내놓았다. 아버지가 한쪽 다리를 잃고 돌아오자 큰할아버지는 그에게 처음부터 차근차근 가르쳐서 몇 년 뒤에는 아버지도 장식품들을 능숙하게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태극무늬, 사슴, 학, 봉황, 공작, 거북이, 모란, 나비, 한자글씨의 복 복자 목숨 수자 편안 강 편안할 녕, 등등 온갖 장식들을 만들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손과 팔을 움직이며 때때로 긴 이야기를 주고받고는 했다.


이진오는 지금 큰할아버지의 공방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아마도 이전에는 퇴근한 할아버지 한쇠가 (이일철이 커서 어른이 된 뒤에도 집에서는 어릴 적 이름이던 한쇠라고 불렀다) 그의 아버지의 일을 도와 풍구를 돌리든가 간단한 아교칠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것이며, 이진오가 태어나기 전에는 소년이던 아버지 이지산이 자기처럼 같은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할아버지 고향 얘기 좀 해주세요. 첨에 어떻게 철도 일을 하시게 된 거예요?”


 “그러니깐두루 인제 내가 태어나기를 강화 선원면에서 났는데 그 지산리라고 작은 동네다. 선원사 아랫동넨데 우리네는 절 땅 붙여먹고 살았다.”


 “그래서 제 이름이 지산이가 되었다구 아부지가 갈켜 주었지요.”


 “동네 사람들은 농사두 짓구 조굿배두 따라댕기구 했다. 강화사람덜 성미가 거시기니 허지. 생활력이 있다구. 어떤 이는 인천이나 마포 삼개로 나가 장사로 성공한 이두 있댔지.”

 

 큰할아버지 이백만은 열세 살 때 인천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인천에는 일본 상점과 여관 술집 등이 많고 청요릿집이나 중국 상점들도 많았고 중국을 오가는 서양 배들도 많았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정미소에 사환 자리를 얻게 된 것은 그가 인천에 도착한 지 두어 달쯤 되어서였으니 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열 살 때 아버지를 따라 까나리 어선을 타고 마포에 나갔다가 일본 잡화상에서 일 년 동안 점원 노릇을 했던 것이 우선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때에도 우연이었는데 마포 나루터에서 아버지 일행이 선주의 까나리 독을 운반하는 동안 이백만은 강변의 장터로 올라가 구경을 했다. 일본 잡화상점 앞에 이르렀는데 인천에서 배에 실려 온 듯한 화물들이 쌓였고 짐꾼들은 들락날락하며 상자를 짊어지고 날랐다. 유카타에 게다 차림의 상점주가 연신 분주하게 가게 안과 바깥 길을 왕래하다가 소년을 보고는 뭐라고 일본어로 말했다. 그가 몇 번씩 쌓여있는 짐과 가게 안을 가리키며 자기 눈에 두 손가락을 찌르듯 하는 동작을 보고 영리한 아이는 대번에 짐을 좀 지키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상자의 운반이 끝나자 상인은 웃는 얼굴로 그에게 오라고 손짓하더니 유리병에서 그야말로 왕누깔만한 사탕을 꺼내어 내밀었다. 조선 엿은 먹어 보았지만 검은 색의 사탕은 더 달고 단단했다. 이백만 소년이 눈을 빛내며 주위에 너저분하게 흩어진 짚이며 톱밥 등속을 손가락질하며 비로 쓰는 동작을 해 보였더니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싸리비와 삼태기 쓰레받기를 내다 주었다. 이백만이 순식간에 상점 앞을 깨끗하게 청소를 마쳤을 바로 그때에 아버지가 그를 찾아왔다.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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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석영(소설가)

「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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