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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y Humble : 겸손하되 열정적으로 살기 위해서

<월간 채널예스> 201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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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 봐야 하는 원고를 두 번 볼까 봐, 메일을 보내지 않고 마감을 미룰까 봐 두렵다. 그런 나는 별로 예쁘지 않다. (2019. 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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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는 한 10분 정도 되겠죠?” 나는 해맑게 물었다.


“아니오. 한 시간 정도예요.”


“네?”


그때부터 불길한 예감이 나를 엄습했다. 한참 동안 카메라를 설치하고 마이크를 옷깃에 꼽고 선을 내 목 뒤로 넘긴 후 기자는 질문을 하고 또 하고, 나는 주어와 술어가 맞는지도 모를 중언부언의 답변들을 쏟아냈다. 감기약 때문에 몽롱해서인지 증강 현실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두어 차례의 사진 촬영을 통해 나의 목 주름이 거울로 보는 것보다 열 배쯤 선명하다는 현실을 파악한 뒤 이번에는 터틀넥으로 목을 철저히 가렸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15년 동안 남의 글만 옮기며 살다가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 라는 첫 에세이를 출간한 지 두어 달 정도가 지났다. 많은 분의 축하를 받고 일간지에도 이름과 사진이 실렸지만 내 20~30대를 돌아보게 하는 한 시간짜리 인터뷰는 아무래도 과하다. 기자는 나의 대학생 시절과 방송 작가 시절의 사진도 보내달라고 한다. 나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라도 만드실 셈인가. 이건 아니다. 심히 괴롭다.


내가 번역했던  『말리와 말썽꾼들』 이라는 책의 저자인 존 그로건은 『말리와 나』 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자 전국을 돌며 책 홍보를 하게 된다. 아빠가 집을 자주 비우자 서운해하는 아이에게 저자는 “얼마 후엔 이 롤러코스터 라이드가 끝나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라고 위로한다.


물론 내 책이 『말리와 나』  같은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아니고, 비행기로 각 도시를 다니며 낭독회를 여는 건 아니라 해도 나는 인터뷰와 북 토크 등을 할 때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어지럽기도 하고 당황스러웠다. 불편했고 쑥스러웠고 그림자처럼 숨어 있던 나를 이렇게 드러내도 되는지,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떠들 자격이 있는지 자문했다. 물론 커리어에 변화를 주고 싶었고 내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잡생각의 파티를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에서 책을 냈지만 그 이후의 이어진 일정들은 내가 원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내가 이토록 어색해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10년이 넘게 하루에 8시간을 책상 앞에서 지루함과 외로움과 초라함을 견디고, 일에 바친 노력과 시간보다 조금씩 부족하다는 여겨지는 대우를 받고 지내면서 어느새 ‘겸손, 겸허, 소박함(humble)’은 내 캐릭터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오늘도 고된 번역 노동으로 정직한 돈을 버는 이 세상의 모든 번역가가 ‘humble’ 하고 ‘modest’ 한 사람이 될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을 조금도 과대평가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동안 쌓인 겸손함이야말로 나의 큰 자산이었다.


번역가로서, 또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하던 오랜 세월을 통과하며 내 한계와 단점에 대해 수없이 성찰했고, 자격지심과 열등감과 좌절감과 후회와 미련 등등 애처롭지만 인간적인 감정들을 끌어안았고, 그것들은 내 글의 재료가 되었고 마음 여린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타인의 달콤한 말이 아니라 내가 보낸 고독한 노력의 시간이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또 나이가 들어서 주목받게 된 사람은 웬만해서는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독일의 소설가 넬레 노이하우스가 실밥 풀린 낡은 니트 톱에 청바지 차림으로 인터뷰를 하러 나오자 인터뷰어가 “독일의 조앤 롤링이라는 억만 장자가 올 풀린 셔츠라니”라며 웃었고, 노이하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만약 스무 살에 작가로 성공했다면 아마도 으스대며 살았겠지. 하지만 마흔 무렵에 처음으로 인정받고 나면 그 사람의 캐릭터가 달라지기는 힘들다. 나는 베개도 옛날 베개 그대로 쓰고, 타는 차도 옛날 차 그대로다. 변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 캐릭터에 단단히 잡은 겸손함이 사라질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다시 한번 “Stay Humble”을 되새긴다. 또 이 표현과 함께 단짝처럼 사용되는 영어 표현 “Hustle Hard”도 큰 소리로 읽어본다. hustle은 바삐 움직이다, 서두르다의 뜻이지만 hustle hard는 치열하게 살다, 노력하다의 뜻으로 쓰이고, “Stay Humble, Hustle Hard”는 무척 유명하여 이 문구로 만든 티셔츠도 있고 굿즈도 많다. 나도 책상 위에 붙여놓고 올해의 신조로 삼고 싶다.


한 시간짜리 ‘인간극장’ 인터뷰가 나오건 열 번의 북 토크를 하건 책을 내기 전과 똑같은 마음과 태도로 살 자신은 있는데, 다만 게을러 질까 봐, 세 번 봐야 하는 원고를 두 번 볼까 봐, 메일을 보내지 않고 마감을 미룰까 봐 두렵다. 그런 나는 별로 예쁘지 않다.


그래서 이제 포털 사이트나 인터넷 서점에서 내 책의 평점과 후기를 찾아보는 짓도 그만하기로 한다(이렇게 쓰고 나니 갑자기 하고 싶어져서 검색했다가 악평을 보았다). 책 홍보라는 롤러코스터 라이드는 거의 끝나간다. 이제 전처럼 아침에 아이를 보내고 빨래를 널자마자 야구와 농구를 보고 싶은 유혹을 이기고 작업실에 달려가 오늘의 책을 펴보기로 결심한다.


Stay Humble, Hustle Hard. 겸손하되 열정적으로 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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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노지양(번역가)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KBS와 EBS에서 라디오 방송 작가로 일했다.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나쁜 페미니스트》, 《위험한 공주들》, 《마음에게 말 걸기》, 《스틸 미싱》, 《베를린을 그리다》, 《나는 그럭저럭 살지 않기로 했다》 등 60여 권의 책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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