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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영화 <로마>
사랑하는 것을 위해 사람은 그렇게 위대해질 수 있다. <로마>의 영화 포스터는 아이들을 구한 뒤 가족 모두가 얼싸안은 그 바닷가의 장면이다. (2018. 12. 27)
영화 <로마> 포스터
5년 전 영화 <그래비티>에서 우주 유영의 ‘우아하고 절박한 느림’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파란만장한 감동의 중력으로 이끌었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돌아왔다. 강력한 힘으로 인간의 아름다움에 다시 사무치게 한다. 가장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던, 그러나 절대로 사적이지 않은 영화 <로마>.
감독은 실제 기억에 의존해 70년대 멕시코의 도시 ‘로마’를 재현했다. 근처의 집을 빌리고 실내를 디자인하고 소품 등을 자신의 것으로 보탰다. 각본, 연출, 제작, 촬영(직접 찍었다), 편집까지, 보여주고 싶은 영상 그대로 완성한 것이다. 거리의 장면, 교차로 등도 실제로 보수하고 재편하여 찍었다고 하니 그 집념이 올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의 면모답다. 흑백 필름에 최첨단 음향시스템인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로 만든 <로마>는 상영관에서 볼 때 그 최적의 감각이 살아난다. 제작사가 스트리밍의 대명사인 전세계 채널 넷플릭스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다. 어쩌면 넷플릭스가 ‘상영관에서 보기 좋은 영화다운 영화’ <로마>를 끌어안음으로써 미래까지도 담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렇게 탄생한 <로마>는 먹먹한 가슴을 안고 극장 앞에서 서성거리게 만든다. 쉽사리 영화의 자장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다. 빛의 대비, 음악, 생활 소음까지도 영화의 층층 밑바닥까지 안내한다. 특히나 그녀 ‘클레오’는 자꾸 떠오른다.
감독의 어린 시절, 입주 가정부였던 ‘리보’가 모델인 클레오는 선하고 강하다. 백인 중산층 집안의 입주 가정부인 인디오 클레오는 새벽에 눈을 떠서 잠들기까지 여주인 ‘소피아’네 가족 일곱과 반려견의 모든 일상생활을 거의 완벽하게 책임지고 있다. 젊고 성실하고 따뜻한 클레오를 아이들 넷은 특히 잘 따른다. 가족 전체가 영화를 보러 갈 때도 여행을 갈 때도, 물리적인 일과 정신적인 의지처로서 클레오의 역할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전적인 성격답지 않게 영화 속 감독의 존재 자체는 흐릿하고 클레오를 중심으로 세계는 형성되어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은 누군가 청소하는 길바닥이다. 비누 거품이 일고, 물로 씻어낼 때 물에 비친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의 선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새롭게 관찰된다. 카메라가 길바닥에서 시선을 들어올릴 때 우리는 빗질하는 클리오의 얼굴을 확인한다. 느린 호흡의 영상 속에서 클레오는 부지런하다. 종일 일하는 클리오의 동작과 소리의 조합은 그 노동이 오래된 일상이라는 것을 단박에 일깨운다.
좁은 별채에 동료 가정부와 기거하는 클레오는 아이들까지 재우고 난 늦은 밤, 자신을 위해 몸 체조를 하며 웃는다. 피고용인으로서의 어둠은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 <로마>의 한 장면
클레오에게 어둠이 닥친 것은 뜻밖의 임신과 남자친구의 무책임한 외면이다. 남편과 이혼하게 되는 여주인 소피아의 정서적 파장을 지켜보았던 클레오는 어느 순간 소피아와 절체절명의 시스터후드를 형성하게 된다. 극히 개인적인 사연이지만 두 여성에게 남자란 허세와 거짓말의 등식이었고, 그것을 견디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다. 삶의 격랑이 인종과 나이, 계급을 넘어서 절정으로 치닫게 하는 것. 멕시코의 시위 학생들을 우익 무장단체가 진압하며 120여 명을 죽인 ‘성체축일 대학살’ 사건. 그날 시위 현장 근처 가구점에서 태어날 아기의 침대를 고르던 클레오는 양수가 터지고 가까스로 병원에 도착한다. 아기는 죽은 채 태어난다.
개인의 사연과 시대의 사건이 맞물리면서 무게감을 더한 밀도 높은 영상은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고발이 아니라 성찰, 절규가 아니라 신음이 그대로 세포를 적신다. 격변기 인간 삶의 진폭이 심장을 두드린다.
이후 바닷가에서 주인집 아이들을 구하러 두려움 없이 성큼성큼 파도 속으로 들어가는 클레오의 모습은 햇살 가득 강렬하다. 사랑하는 것을 위해 사람은 그렇게 위대해질 수 있다. <로마>의 영화 포스터는 아이들을 구한 뒤 가족 모두가 얼싸안은 그 바닷가의 장면이다. 대개의 포스터는 영화 관람 전과 후가 다르게 보이지만, 특히 <로마>의 포스터는 영화를 보고 난 뒤라면 눈길을 뗄 수 없는 힘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빨랫감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는 클레오의 위로 비행기는 날고, 자막엔 ‘리보를 위하여’라고 적힌다. 감독이 자신을 키웠던 이를 기억하는 일이 우리 모두에게 구원이 되었다. 결국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니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YES24 채널예스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