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과의 투쟁’을 시작한 편지공화국
인쇄술은 근대를 가능케 했다
인쇄술이 발명되자 지식은 동시에 수백, 수천 부로 재생산될 수 있게 되었다. 지식의 축적이 가능해졌고, 대중이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의 범위도 확대되었다. 이는 ‘개인적 지식’이 ‘공적 지식’의 영역이 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됨을 뜻한다. ‘사상’이라고 하는 공적 지식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2018. 10. 05)
바우하우스의 학생이었던 막스 빌(Max Bill)이 디자인한 시계(좌)와 최근 출시된 애플워치(우). 사뭇 닮았다. 21세기 애플의 디자인은 막스 빌이 수학했던 1920년대의 바우하우스를 알아야 제대로 설명된다. 디자인 능력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나는 삼성 스마트폰 ‘갤럭시 노트’의 충실한 고객이다. ‘갤럭시 노트1’부터 ‘갤럭시 노트9’까지 새로운 기종이 나올 때마다 매번 가장 먼저 구입한다. 갤럭시 노트에 포함된 펜의 기능은 항상 나를 행복하게 한다. 너무나 훌륭한 캡처 기능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데이터든 그저 펜으로 긁어내 데이터베이스로 전송하면 된다. 기능에 관한 한, 삼성의 기술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뭔가 부족하다. 항상 그렇다. 옆 매장의 아이폰에 자꾸 한눈을 팔게 된다. 새로 나온 ‘갤럭시 워치’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폰이 갤럭시 노트인 까닭에 삼성의 갤럭시 워치를 쓰지만, ‘애플 워치’를 한번 손목에 차고 싶다는 욕심이 자주 생긴다. 도대체 이 불만족은 어디서 오는 걸까?
디자인의 차이다. 많이 나아졌지만, 삼성의 디자인은 여전히 애플의 디자인을 쫓아가지 못한다. 디자인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 옷 입는 것도 3대는 거쳐야 나아진다는 말처럼, 미의식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이는 것이다. 그림 1은 애플워치의 디자인과 독일 바우하우스의 학생이었던 막스 빌(Max Bill, 1908~1994)이 디자인한 시계다. 스위스 출신의 막스 빌은 청년 시절 데사우의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막스 빌은 바우하우스의 재건을 목표로 서독의 남부 도시 울름(Ulm)에 울름조형대학(Hochschule fur Gestaltung Ulm)을 설립하고 첫 번째 학장을 지냈다. 울름조형대학은 독일 전자회사 브라운(Braun)과 산학협동을 통해 산업디자인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애플의 디자인을 책임지고 있는 조너선 폴 아이브(Jonathan Paul Ive, 1967~)는 자신은 브라운의 디자인을 베끼고 있다고 내놓고 이야기한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오래전 막스 빌이 디자인한 시계와 최근 출시된 애플 워치의 디자인에는 어딘가 유사함이 존재한다. 애플로 대표되는 모던 디자인의 기원을 쫓아가보면 독일의 바우하우스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20세기 초반의 바우하우스는 ‘예술과 기술-새로운 통합(Kunst und Technik-eine neue Einheit)’을 주장했다. 산업혁명을 가능케 한 산업계몽주의는 ‘실용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 즉 ‘기술’과 ‘과학’의 결합이었다. 18세기 ‘과학과 기술의 편집’에 이어 ‘기술과 예술의 편집’이라는 새로운 지식혁명이 20세기 초 독일 바이마르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새로운 지식혁명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애플의 제품에 여전히 구현되고 있다.
논의의 틀을 조금 넓혀 설명해보자면 ‘편지공화국’에서 시작된 지식의 편집혁명은 산업혁명에서 그 존재 가치를 드러내고, 20세기 초 바우하우스의 디자인혁명을 거쳐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보통 편지공화국은 15세기에 시작해 산업혁명 시기에 소멸된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네덜란드 위트레히트 대학(Universiteit Utrecht)의 판 미르트(Van Miert) 교수는 나와 유사한 관점에서 편지공화국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오늘날까지 이르는 편지공화국의 계보를 각 시기마다 교류되었던 지식의 특징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5세기부터 편지공화국은 국경을 초월하는 지적 네트워크로 실질적인 영향력을 갖게 된다. 판 미르트는 15세기 편지공화국의 지식편집 특징을 ‘고전으로의 전환(classical turn)’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재해석하며 ‘지식’이라는 무형의 성과물들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의 학자들은 편지공화국이라는 국경을 초월하는 네트워크를 통해 각기 다른 지역에서 쌓아온 ‘지식’을 공유하며 ‘편집’하기 시작했다. 고전철학과 고대역사에 집중한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의 활약이 특히 돋보이는 시대였다.
‘고전으로의 전환’은 1453년에 일어난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 로마 문화의 전통이 잘 보존되어 있던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무너지자, 그곳에서 활동하던 예술가와 학자들이 앞다투어 이탈리아로 탈출한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그리스어로 된 고전을 읽을 수 있는 학자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그리스 고전은 기껏해야 라틴어로 번역된 것을 읽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리스 원전에 능한 학자들이 합류하면서 이탈리아 학자들의 지식편집은 차원을 달리하게 된다.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그리스, 로마의 자료가 잘 보존되어 있던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함락된다. 이때 그리스, 로마 원전에 능한 콘스탄티노플의 학자, 예술가들이 대거 이탈리아로 탈출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바로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알프스를 넘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간다. 16세기 편지공화국의 연구 주제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고전과 유물로 그 범위가 넓어졌다. 물론 일부 사제들만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던 중세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접근이었다. 텍스트로서의 성서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유물, 동상이나 동전, 기념물 등으로 연구의 자료 또한 다양해졌다. 편지공화국의 소속 학자들이 다른 학자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자료들이 동봉되었다. 동전에 종이를 올려놓고 눌러 만든 자국, 건물이나 동상의 그림, 무덤에서 나온 자료들의 필사본 등등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의학적 실험, 천문학적 관찰, 식물학적 관찰 등의 보고 자료들도 서로 공유되기 시작했다. 이런 자료들은 그리스, 로마의 자료들과 비교되면서 고대인들에 대한 지적 도전이 이뤄지기 시작한다. 이른바 ‘고대인과의 투쟁’이다.
고대인과의 투쟁, 즉 고전에 대한 비판적 해석이 가능해지면서 서양은 동양을 앞서게 된다는 것이 앞서 설명한 『성장의 문화』 의 저자 조엘 모키르의 주장이다. 산업혁명 이전, 중국의 과학기술을 포함한 중국의 문화는 유럽을 능가했다. 중국의 지식시장은 유럽이 쫓아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 같은 지식시장은 ‘과거제도’와 같은 ‘신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사다리’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신분상승은 범위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서양의 신분제도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중국의 수나라 때부터 시작된 과거제도는 일정 수준 이상의 지적 능력을 발휘해야 했다. 그러나 그 지적 수준의 판단 기준이 어느 순간부터 ‘고대인들의 지식’의 모방과 반복에 그치기 시작했다. ‘실용적 지식’에 대한 천시와 더불어 고대인의 지식에 근거한 ‘형식적 지식’만을 유일한 지식으로 인정했다. 즉, 기술을 천시하고, 고전을 반복해서 외우는 지식문화가 일반화된 것이다.
서양의 산업계몽주의에서 일어났던 ‘기술(실용적 지식)’과 ‘과학(형식적 지식)’의 통합이 동양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울러 과거제와 같은 지식 인센티브 시스템은 서양의 편지공화국의 인센티브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구조로 움직였다. 동양의 과거제는 교류를 통한 지식의 공유보다는 지식의 독과점 구조였다. 이 지식의 독과점구조는 ‘고대인과의 투쟁’보다는 ‘고대인에 대한 모방’을 통해 유지되었다.
16세기 편지공화국의 ‘고대인과의 투쟁’은 다양한 관찰, 실험 자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대인들의 오류가 사방에서 관찰되고 보고되었다. 고대인들을 훨씬 뛰어넘는 자신들의 지식문화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고대인들이 자신들의 세상에 온다면 자신들의 지식수준에 감히 범접하지 못할 것이라 큰소리를 쳤다. 이러한 ‘고대인과의 투쟁’의 배후에는 인쇄혁명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1450년경, 독일의 요한 구텐베르크(Johann Gutenberg, 1400~1468)는 마인츠에서 금속활자를 발명했다. 1450년 즈음에 인쇄 공장을 차려 본격적으로 책을 대량생산하기 시작했다. 처음 출판된 책은 『성서』였다. 그러나 구텐베르크 성서는 라틴어 성경이었다. 모든 사람이 읽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성서를 모두가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 이후부터다. 1517년 루터가 비텐베르크(Wittenberg) 궁정교회의 문에 게시한 95개조의 반박문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불과 15일 만에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인쇄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1521년 가을부터 1522년 봄까지 불과 11주 만에 루터는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신약과 구약이 모두 독일어로 번역되기까지는 10여 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 하지만 사제만 읽고 해석할 수 있었던 성경을 일반 신자들이 스스로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하나의 ‘지식혁명’이었다. 인쇄혁명으로 인해 정보 독점의 구조가 해체되면서 ‘고대인과의 투쟁’뿐만 아니라 ‘동시대 지식권력과의 투쟁’도 가능해진 것이다. 판 미르트는 이 같은 16세기 편지공화국의 지식혁명을 ‘기독교적, 성서적 전환(ecclesiastical and biblical turn)’으로 이름 붙인다.
구텐베르크의 인쇄혁명. 인쇄술은 근대를 가능케 했다. 지식의 축적과 확장이 가능해지면서 지식의 옳고 그름의 판단, 혹은 지식의 유용함의 판단은 더 이상 소수의 권력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 보편적 지식, 즉 ‘상식’과 ‘사상’이 출현한 것이다. 루터가 비텐베르크(Wittenberg) 궁정교회의 문에 게시한 95개조의 반박문이 불과 15일 만에 독일 전역으로 퍼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비텐베르크의 인쇄술 덕분이다.
‘지식의 축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도 인쇄술의 발명은 인류 역사를 변화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전의 지식전달은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 전달되는 지식이 대부분이었다. 이른바 ‘암묵적 지식’이다. 따라서 이 같은 지식이 전달되려면 일대일로 지식을 전달하는 ‘도제제도’와 같은 지식공유 시스템을 거쳐야 했다. 기술 장인들의 이 같은 지식전달의 방식은 지식공유의 한계가 분명한 시스템이었다. 특정 지식은 지식전달의 맥이 끊기기 일쑤였다. 한 번 사라진 지식을 복구하는 일은 또 다시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일부 ‘형식화된 지식’, 즉 ‘과학적 지식’ 또한 필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필사를 통한 지식전달은 필사하는 이의 의도에 따라 언제든 왜곡이 가능했다. 이렇게 왜곡된 지식은 좀처럼 바로잡기 힘들었다. 대중이 공유하며 축적할 수 있는 지식은 그리 다양하지 않았다.
인쇄술이 발명되자 지식은 동시에 수백, 수천 부로 재생산될 수 있게 되었다. 지식의 축적이 가능해졌고, 대중이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의 범위도 확대되었다. 이는 ‘개인적 지식’이 ‘공적 지식’의 영역이 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됨을 뜻한다. ‘사상’이라고 하는 공적 지식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식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종교개혁 또한 개인적 지식이 공적인 담론의 영역으로 확장하여 사상으로 구축됨을 뜻한다. 일부 지식권력에 국한되었던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대중에게 주어주며 ‘보편적 지식’이 가능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식의 자유와 경쟁이 가능해지면서 편지공화국은 더욱 번성했다. 앞의 연재에서 설명한 ‘대분기’를 가능케 했던 ‘고대인과의 투쟁’ 또한 인쇄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문화심리학자이자 '나름 화가'.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에디톨로지> <남자의 물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다. 현재 전남 여수에서 저작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