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교석의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최소한으로 최대의 효과를 만드는 일상 아이템
나만의 세계를 비추는 조명의 안온함
특별한 선호가 없다면 시작은 클래식으로 하는 편을 권한다. 관절이 꺾이고 스프링이 달려 있는 일명 ‘제도 조명’ ‘작업등’ 등으로 불리는 제품을 추천한다. (2018. 10.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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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초등학교 3~4학년 때였던 것 같다. 부모님이 우리 3남매에게 각자 개인 책상을 사주면서 생에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이란 자각이 생겼다. 권투선수의 리치, 검도선수의 칼날의 반경처럼 그 책상은 약간의 공부와 잡서 탐독 및 음악 감상,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내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나만의 체계와 질서로 움직이는 세계, 내가 간택한 아이템들만이 숨을 쉬는 또 다른 세상의 역사가 시작됐다. 책상 위로 솟은 책꽂이형 책장은 난공불락의 산성과 같았고, 메인 서랍장의 시건 장치는 내 세계의 영혼을 굳건히 지키는 지하 비밀 금고였다. 이 왕국에 허락된 인물은 나만이 유일했고, 어머니의 걸레질도 웬만해선 허락하지 않았다.
책상은 피노키오사의 제품이었다. 책장과 스탠드까지 한꺼번에 갖춘 일체형 책상이었는데, 책장 아래에 흰색 네모난 형광등 박스가 달려 있던 게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날 만큼 인상적이었다. 이 박스에는 형광등 스위치와 110볼트짜리 콘센트도 하나가 달려 있었다. 가구에 빌트인 된 전면 콘센트라니, 살면서 마주한 적 없는 신문물이었다. 미적인 측면에서나 기능적인 측면에서나 날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사실 독서실 책상의 가정용 버전일 뿐이지만 독서실이란 것 자체를 몰랐던 내게 천장에 달려 있는 형광등이 책상에 달렸다는 것만으로도 전기의 발명에 버금 갈만큼 신기한 문명의 이기였으며 르네상스의 시작이었다. 그 덕분에 부모님 신경을 보다 덜 쓰고 잠을 미룰 수가 있었고, 나만의 세계를 비추는 조명의 안온함 속에서 하나 둘 삶에 애착이란 걸 갖게 됐다.
일반 형광등에서 삼파장 형광등으로 바뀌는 세월 동안 나는 계속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렇게 고3까지 그 책상 앞에서 보냈다. 그 후 대학 기숙사, 원룸, 옥탑방, 85제곱미터의 반전세집을 거쳐 일본 맨션 사향으로 3DK의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하기까지 이사 갈 집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책상을 놓을 그럴듯한 자리였고, 새로운 공간에 애정을 두는 첫걸음도 책상을 가꾸는 것에서 시작했다.
회사 중역의 사무실이나 대문호의 서재처럼 장엄하거나 우주선 조종석 같은 첨단 기계가 가득한 그런 것이 아니라, 방 한 구석에 조그맣게 박혀 있더라도 세상살이의 무게와 현실의 퍽퍽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익숙하고도 편안한 무드가 중요했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기거하면서, 가장 애를 쓰고 스트레스를 받는 공간이기도 한 만큼 책상은 집 안의 그 어떤 곳보다도 코지(cozy)한 정서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그런데 기숙사와 원룸 생활을 통해 독립하다보니 미니멀 라이프는 취향이 아니라 숙명이었다. 자연스레 책상 자체보다는 그 위에 놓이는 탁상 스탠드를 통해 분위기를 잡아가는 길을 걸었다. 멋진 책상을 갖출 생각보다는 책상 벽 옆에 둘 벽걸개나 책상 위에 붙일 선반, 책장, 장식품 등에 더 많은 관심을 할애했다. 돌이켜보면 책상 자리, 그 분위기, 그리고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은 책상 자체의 물성에 대한 관심보다 내 시야 공간만을 오롯이 비췄던 피오키오사의 형광등에 대한 향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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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탁상 조명에 관심을 두게 된 보다 직접적인 계기는 기숙사와 월세 생활을 하면서부터다. 다른 건 주어진 환경에 적응에 산다고 하더라도 책상 위만큼은 내가 만들어갈 수 있는 최소 단위의 개인 공간이다. 집 안이 온통 동남아 가게나 오징어잡이 배처럼 환한 주광색 일색이라고 해도, 책상 스탠드만큼은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과 빛과 온도를 가진 조명으로 나만의 분위기를 가져가는 게 가능하다. 감성이 투영된 오브제면서 일상의 동반자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탁상 스탠드는 기본적으로 존재감은 있되, 질리지 않는 무던함과 튀지 않는 모던함을 갖춰야 한다. 괜히 일이 잘 될 것 같은 전문가의 작업 공간 같은 분위기도 살짝 풍겨야 하고, 오랜 기간 함께한 친구 같은 변치 않는 편안함과 눈 건강과 피로 같은 기능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고가의 스탠드는 가성비가 나쁜 편이다. 아무리 가치를 높이 산다 해도 지엘드나 카이저이델 같은 주물 제품에 몇 십, 혹은 백 만 원 가까이 주고 사기란 쉽지 않다. 눈 건강을 생각하면 마음을 바꿀 필요도 있으나 아직까지 내 공간에 라문의 아물레또 스탠드처럼 <스타트렉>에서나 나올 법한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은 들이고 싶지 않다. LED 등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건 알고 있지만 학생이나 직장인 책상에 있을 법한 플라스틱 등도 피하고 싶다. 만약, 눈 건강을 가장 중히 생각한다면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개발했다는 발뮤다의 데스크 스탠드를 눈여겨보자. 무엇보다, 워낙에 카피가 많아 뭐가 카피인지도 모를 지경이지만 오픈 마켓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저가형 제품과 원작 사이의 아우라는 가격 이상의 차이가 난다는 점을 유념하자.
특별한 선호가 없다면 시작은 클래식으로 하는 편을 권한다. 관절이 꺾이고 스프링이 달려 있는 일명 ‘제도 조명’ ‘작업등’ 등으로 불리는 제품을 추천한다. 전통적인 디자인이고 어떤 작업 공간에서도 어울린다. 사대적인 발언이긴 하지만 왠지 프레피룩처럼 느껴져서 괜히 글이나 작업이 잘 될 것 같고 뭔가 역사가 깃든 것 같고 그렇다. 제도 조명에 관심이 간다면, 에코백의 제왕 마가렛 호웰도 즐겨 쓴다는 영국의 앵글포이즈 제품을 가장 무난하게 추천한다. 검색해보고 가격에 화들짝 놀랄 수도 있겠다. 그런 배신감을 느낀 독자들을 위해 가성비를 가장 우선으로 고려하면 이케아보다 더 좋은 선택지는 없다. 그들이 추구하는 여유로운 북유럽 라이프스타일은 세계적인 범용성을 띄는 데다 값에 비해 재질과 만듦새가 떨어지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튀지 않는다. 다만, 이케아 스탠드는 전현무 집부터 우리 옆집까지 광범위한 사람들이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염두에 두도록 하자.
푸른숲 출판사의 벤치워머. 어쩌다가 『아무튼, 계속』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