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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의 턱 : 늘 악물어야 했던 삶의 흔적기관
4500만의 자긍을 대신 짊어지느라 가려졌던 인간 박찬호를 보다
사람들은 박찬호의 턱에서 강인함과 투지를 읽어내지만, 정작 그는 아직도 투구할 때 이를 악물어 얼굴이 한쪽으로 뒤틀린 채 찍힌 사진들을 보는 게 콤플렉스란다. (2018. 10. 01)
저 아저씨 원래 저렇게 이상했던가. SBS 새 예능 <빅픽처패밀리>에서 만나는 박찬호는 전에 없이 새로워서 이상할 지경이다. 언제나 진지한 표정과 말투로 자신이 고난을 극복한 경험담을 들려주고 삶을 바라보는 자세를 이야기하던 이 친절한 투머치토커는, 절친인 형 차인표와 함께 하는 예능 프로그램에선 사람들이 한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차인표를 골려주기 위해 한국 말을 잘 못하는 손님을 연기하며 “미쿡에서 왔숴요, 항쿡말 잘 못해요.”를 연발하는가 하면, 팀워크를 다진답시고 쓸데없이 아침 구보를 하는 차인표에게 갑자기 시상이 떠올랐다며 시 낭송을 빙자한 불평을 토해낸다. “밤 늦게 인터뷰하고 늦게 잠든 찬호, 새벽부터 인표 형이 깨우네. 인표 형 피해 건넌방 가서 다시 누우니 류수영이 다시 와서 깨운다…” 진지함을 모두 벗고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절친 차인표와 티격태격하는 모습부터, 멤버들을 위해 정성스레 김치찌개를 끓이다가 막판에 MSG를 때려 넣는 모습까지, <빅픽처패밀리>의 박찬호는 한결 평범하고 편안해 보인다.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 쪽이 원래의 박찬호가 아니었을까?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라는 타이틀을 안고 미국 땅으로 건너갔던 박찬호는, 하필이면 커리어가 만개할 무렵 조국이 망하는 바람에 졸지에 4500만명분의 자긍심을 대신 충족시켜 줘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연일 부도와 정리해고, 파산 같은 암울한 상황 속에 둘러 싸여 있던 한국인들은 강속구를 던지는 박찬호의 모습에 열광했고, 제 몫의 책임감만 지기에도 평정을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은 메이저리그에서 박찬호는 온 국민의 기대감을 어깨에 짊어진 채 이를 악물고 공을 뿌렸다. 어찌나 이를 악물었던지 잘 때에는 마우스피스 없이는 잠을 자지 못했고, 선수 생활 막바지에는 턱관절 장애를 앓느라 성적이 부진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가 만약 딱 자기 몫의 책임과 자긍만 짊어지고 살았다면, 그래서 때로는 웃고 때로는 농담도 하면서 살 수 있는 삶을 살았다면, 실없는 농담을 일삼고 아침엔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싶어 잠투정을 부리는 평범한 모습을 조금은 더 일찍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박찬호의 턱에서 강인함과 투지를 읽어내지만, 정작 그는 아직도 투구할 때 이를 악물어 얼굴이 한쪽으로 뒤틀린 채 찍힌 사진들을 보는 게 콤플렉스란다. 그는 여전히 MBC 파일럿 예능 <독수공방>에서 보여준 것처럼 과거의 우승볼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는 것으로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고난을 극복해 낸 여정과 지금의 박찬호를 만든 시간들의 기록이니까. 그러나 박찬호의 앞에는 그보다 더 많은 날들이 놓여 있다. 이 알고 보면 실없고 유쾌한 남자가, 딱 자기 몫의 기대만 가볍게 걸쳐 멘 채 새로운 것들을 꿈꾸고 계획하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더 이상 악문 턱이 부각될 일 없는 평탄한 삶의 길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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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