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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빨개지는 아이

감정의 온도가 표정에 다 드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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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진 나만의 생각, 나만의 느낌, 나만의 고통은 없다. (2018. 09. 13)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수줍음은 보편적이고 완벽하게 정상적인 인간 특질이다. 수줍음은 나중에 후회하느니 안전한 길을 택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엄청난 생존가치가 있다. (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 saving normal』  앨런 프랜시스, 사이언스북스)

 

영화 <미쓰 홍당무>였던가. 배우 공효진이 시도 때도 없이 얼굴 빨개지는 선생님으로 나오는 영화로 기억하는데, 그 주인공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얼굴이 자주 빨개진다. 강의를 하고 나면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는 청중이 있다. 그런 부탁을 받으면 은근히 기분은 좋다. 내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들어주셨다는 의미일 테니까. 그런데 여간 어색한 게 아니다. 셔터를 누를 때면 내 얼굴은 빨개져 있다.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 바짝 긴장한 탓이다. 부끄럽고 어색하면 어김없이 얼굴이 붉어진다. 나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주변에 있던 사람이 “선생님 얼굴 빨개지셨어요”라고 하면 그제야 ‘아 내가 긴장했구나!’ 하고 깨닫는다.

 

몇 달 전 홍대 근방의 녹음실에 갔다. 작년에 라디오에 출연하면서 인연을 맺었던 아나운서가 팟캐스트를 시작했는데 게스트로 초대를 받았다.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하면 되냐고 물었더니 운동과 심리에 대해 수다를 떨면 된다고 했다. 평소에 관심 있는 주제라 좋았다. 나 말고도 여성 운동 코치(헬스 트레이너라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도 같이 대화를 나눌 거라고 했다. 일상에서 부담 없이 운동을 시작하고 지속할 수 있는 법, 그래서 자기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해질 수 있도록 가르치는 분이라고 했다. 팟캐스트 녹음이라 그런지 자극적인 질문(불쾌하지는 않았으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한)도 오가고 서스럼 없이 농담도 주고받다 보니 진땀 나는 순간들이 제법 있었다.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고 분위기가 편하게 무르익자 운동 코치가 내게 말했다. “선생님처럼 금방 빨개졌다 하얘졌다 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온도계 같아요. 감정의 온도가 표정에 다 드러나요.”

 

어릴 때는 이런 말을 들으면 주눅이 들었다. 그러면 더 긴장됐다. 남들이 하지 않는 질문을 하려고 하면 심장이 빨리 뛰었다. 긴장한 것이 티 나지 않도록 천천히 숨을 쉬어봐도 별 소용이 없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목소리에 작은 떨림도 묻어났다. 불안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묻고 싶은 게 있어도 속으로 접어두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뭐 어때’라며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조금 신경이 쓰이긴 한다. 얼굴 빨개지는 걸 두고 상대가 내 마음을 어떻게 해석할까, 의식할 때도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상대가 뭐라던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잖아’라며 마음에 두지 않는다. 얼굴이 빨개지는 나를 두고 긴장을 잘 한다거나 불안한 게 티가 난다고 해도 ‘그래서 뭐 어쩌라고!’하며 무시해버린다. “불안은 불안이고 삶은 삶이니까” 불안을 느끼지 않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불안에 휘둘리지 않으면 된다. 다시 말하지만 “뭐 어때!” 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상담하면서 만난 큰 회사의 임원이나 대표 중에도 발표하기 전에 불안에 떠는 분들이 정말 많았다. 겉만 봐서는 긴장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을 것 같고, 마주 앉아 이야기할 때면 그렇게 달변일 수가 없었는데, 직원들 모아 두고 스피치를 하면 심하게 떨린다고 했다. 안정제를 상비약처럼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어떤 사장님은 직원들 모아 두고 훈시하는 자리는 아예 만들지도 않고, 꼭 해야 하면 다른 임원에게 대신 맡긴다고 했다. 정확한 비율은 알 수 없어도 내 경험에 비춰보면 항불안제를 복용해본 적이 있는 높은 지위에 있는 분들(혹은 대표나 회장, 최고경영자나 교수, 의사 등)이 꽤 많을 것 같다.

 

수련 기간까지 합치면 거의 20년 동안 정신과 의사 노릇을 했다.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을 통해 삶을 배웠다. 그러면서 터득한 것 한 가지만 꼽으라고 하면 “누가 누구보다 성숙하다, 누가 누구보다 성격이 좋다. 누가 누구보다 더 행복하다.” 같은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라는 것이다. “이 당연한 이야기를 정신과 의사 생활을 20년이나 하고 나서야 깨달았나!”라며 한심하게 여길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로 알던 것을 체험으로 반복해서 확인하고 또 확인했더니 이런 비교가 무의미하다는 걸 온 몸에 새길 수 있었다. 이런 체험들이 몸에 쌓이고 쌓이다 보니 이제는 웬만해선 주눅 들지 않는다. 아무리 유명하고 잘난 사람 앞에서도 ‘그래봤자 너나 나나 크게 다르지 않아. 너나 나나 나약한 인간에 불과해’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간해서는 쫄지 않는다.

 

타인의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진 나만의 생각, 나만의 느낌, 나만의 고통은 없다. (이렇게 말해도 “내 고통은 오직 나만이 안다. 니들이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 하고 원망하며 소리 지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 나와 타인 사이의 유사성을 확인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나와 가까워지는 느낌이 든다. '너와 내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내가 나를 받아들이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창피하고 어색하면 내 얼굴은 지금도 빨개진다. 마흔을 훌쩍 넘기고, 정신과 의사 생활도 꽤 했지만 내 안에 있는 여린 마음의 어린아이는 자라지 않은 채 그대로다. 수줍고 긴장할 때마다 이 아이의 심장은 어김없이 쿵쾅거린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아니 어쩔 수 없다. 나란 사람에게는 여전히 뭔가 부족하고 뭔가 아쉬운 점이 있지만,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될 리도 없다. 나 자신에게도 그렇지만 괜히 강한 척하는 사람에게는 정이 안 간다. “약해 빠진 것도 싫지만, 감춰둔 약점 한두 개쯤 엿보이지 않는다면 답답하고 피곤해서” (『사랑에 관한 짧은 기억』  무라카미 류, 태동출판사) 이런 사람과는 친해지고 싶지 않다. 어수룩하고, 잘 긴장하고, 여리고 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나는 좋다. 빡빡하게 각 잡고 있는 사람은 한두 번쯤은 만나겠지만, 그 이상은 안 보게 된다.

 

어차피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나를 바꾸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굳이 바꿔야 하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나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게 중요하다. 불안을 느끼지 않는 게 아니라, 불안을 느끼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얼굴 빨개져도 “뭐 어때”하는 마음, 긴장하는 나를 포용하는 것.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이런 태도가 중요하다.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조용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자세, 말이다. 이보다 쉬운 건, 나에게 어울리는 사람과 환경을 찾아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맥락을 바꾸는 게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훨씬 쉽고 효과도 좋다. 덧붙여 말하지만, 당신은 있는 그대로 훌륭하다. 절대 변하지 마라.

 

괴로움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자신이 바로 괴로움 그 자체라는 환상만 강화한다. 괴로움에서 도피하려는 노력은 그 괴로움을 영속화시킨다.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괴로움 그 자체가 아니다. 괴로움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다. 괴로움과 동일시한다는 것, 이것이 유일한 곤경이다. (『무경계』   켄 윌버, 정신세계사)

 

 

 



 

 

무경계켄 윌버 저 | 정신세계사
그대로 유지한 채 일반독자를 위해 간소화 내지 대중화시킨 책으로, 일반 독자들이 좀 더 쉽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애쓴 저자의 노력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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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병수(정신과의사)

정신과의사이고 몇 권의 책을 낸 저자다. 스트레스와 정서장애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진료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교수 생활을 9년 했고 지금은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의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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