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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벨벳, 복잡한 마음으로 즐기는 여름
레드 벨벳 『Summer Magic』
멋진 신세계가 있었던 에프엑스와 거대한 이름을 향해 정진하던 소녀시대와 달리, 지금의 레드 벨벳은 미래의 문법을 빌려와도 수려한 공산품 이상을 넘보지 않는다. (2018. 08. 14)
「Power up」 속 레드 벨벳은 여름을 배경으로 한 8비트 아케이드 게임 속 캐릭터 같다. ‘바바나나 바바 바나나나나’ 파편화된 후킹 멜로디부터 ‘Go Go Airplane’ 후렴까지 이 곡에서 보컬은 장난스러운 전자오락 속 칩튠 샘플처럼 기능한다. 정말 최소한의 소리만 갖춘 도입부에서의 존재감을 끝으로 목소리는 기묘한 휴머노이드로 변조되어 질주한다. 강력한 하나의 테마로 수렴되던 과거의 싱글들도 멤버 개개의 보컬 파트를 쌓아나가다 후렴 부의 합의를 끌어냈던 것을 비춰보면 완벽한 ‘인간성 박탈’이다.
빈틈은 무국적의 소음으로 가득 채웠다. 기계화된 가창은 ‘들뜬 맘의 백그라운드 뮤직’ ‘반짝인 그 Ocean 위로 난 날아’ 등의 어지러운 단어 선택으로 더욱 쉽게 들리지 않는다. ‘카우아이 파도 속 나를 던져 버리게’를 카와이로 들어도, ‘그런 게 우리의 천재적인 파워야’가 대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베일 정도로 철저하게 나눠진 구획 속 무더운 여름 속 청량한 ‘파워 업’의 이미지 각인을 위해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어휘들과 사운드 충돌에 넋을 놓는다면 일단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멤버도 없고 가사도 없는 이 곡에선 오직 여름과 소리, 그리고 소녀들의 잔상만 어지럽게 귀를 찌른다.
얄밉게도 <Summer Magic>은 이처럼 극단적인 오프닝 직후 언제 그랬냐는 듯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로 앗아갔던 보컬 텍스쳐를 돌려준다. 언제나 기본 이상은 됐던 일렉트로 팝은 <The RedSummer>이후 일관된 테마 아래 정리되며 더욱 그 퀄리티를 높였고 이번 앨범 역시 여름이란 공통분모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즐거운 튠들이 팝핑 캔디처럼 톡톡 튀어 오른다. 소속사 주력 라인업다운 안정적 포지셔닝과 공식화된 노하우가 있기에 「Power up」 같은 실험도 가능한 것이리라.
청량한 뭄바톤 리듬 위 설레는 메시지를 한 스쿱 얹은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에선 직관적 멜로디라인을, 잰걸음 하는 절과 선 굵은 후렴을 교차한 「Mr. E」에선 노련한 완급조절을 과시한다. <Perfect Velvet>의 차가움을 <The Red>의 깜찍함으로 녹여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Mosquito」와 에프엑스 스타일의 경쾌하면서도 신비로운 일렉트로 팝을 계승한 「Hit that drum」 「러시안 룰렛」의 달콤한 왜곡을 한껏 끌어올린 베이스라인으로 드리블하는 모노트리와 수줍은 서지음의 가사로 상큼하게 착즙하는 「Blue lemonade」 까지 놓칠 곡이 없다.
그러나 마지막 「Bad boy」의 새 버전에서 잊고 있던 「Power up」의 함정이 다시금 퍼뜩 스쳐 간다. 매력적인 미니멀 비트와 평범한 가창이 불편하게 공존하던 이 곡의 새 버전은 놀랍게도 영어 곡과 원곡의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다. 개성 있는 음색의 보컬 라인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정 전달 이외의 감흥은 모두 거세해 버린 듯한 이런 지향점은 일본 데뷔 EP <#Cookie Jar>에서 은근히 예고된 바 있었다.
잘 만든 여름 바캉스 앨범을 앞에 두고도 즐기는 마음은 썩 복잡하다. 몇 번의 시행착오는 있었을지언정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놓치지 않았던 그룹이라는 점이 오히려 역설로 다가오는 순간이 온 것이다. 멋진 신세계가 있었던 에프엑스와 거대한 이름을 향해 정진하던 소녀시대와 달리, 지금의 레드 벨벳은 미래의 문법을 빌려와도 수려한 공산품 이상을 넘보지 않는다. 총 천연으로 덮인 화이트 노이즈. 만듦새를 넘어 어떤 의미를 기대하는 건 이제 욕심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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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