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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하게 불러보는) 산책
산책이라 부르고 싶은 퇴근
산책할 시간이 도통 없어, 퇴근길을 산책이라 부르고 있다. 시원한 회사 밖을 나서며 얼음을 가득 넣은 물통을 한 손에, 다른 한 손에는 휴대용 선풍기를 들고 길을 나선다. (2018. 08. 10)
덥다. 생각하면 할수록 속상해질 정도로 덥다. 그렇게나 덥지만 날씨를 느낄 틈이 많지는 않다. 종일 에어컨이 나오는 회사 안에 있고 이동할 때는 걷는 동선을 최소화해주는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더위 덕분인지, 날씨를 느낄 틈 없이 바쁜 하루 덕분인지, 요즘은 생각이라는 것을 제대로 할 겨를이 없다. 행복이나 슬픔, 외로움 같은 단어가 멀리 있고 마음이나 머리에 든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그 날 주어진 일을 착실하게 해나갈 뿐이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하루는 빠르게 지나간다. 야근을 끝낸 뒤, 집에 오면 고양이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고양이 등을 두드리고 남은 힘을 짜내 그와 놀고 나면 졸음이 쏟아진다.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든다.
그나마 더위를 느끼고 온전히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은 퇴근할 때다. 그때라도 걷지 않으면 움직임이 거의 없어서 더워도 꾹 참고 걷는다.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회사에 다니기 전에도 자주 걷던 곳이다. 그때는 산책길이었는데 지금은 퇴근길이 되어버렸다. 산책이라 부르기는 어색한 일이지만 굳이 산책이라 부르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오늘도 그 길을 따라 산책(퇴근)했다. 언젠가 다른 이름을 가졌던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이전에 있던 일이 하나 떠올랐다.
춘천의 한 책방에 취재를 갔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요즘 가장 행복한 일이 뭐예요?"라고 물었다. 여자는 벽에서 엽서 두 장을 떼어왔다. 다른 나라로 휴가를 떠난 손님들이 그녀의 책방으로 보내준 편지들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생각해주는 일이 행복하다고 말하며 내 행복은 무어냐고 되물었다. 별다른 망설임없이 수영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묘사했다. 수영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은 풀장 안의 사람들을 하나로 모았다. 물속에서 동그랗게 선 다음, 옆 사람의 손을 잡고 “파이팅!”을 외치고 수업이 끝났다. 그게 그렇게 좋았다. 잘 모르는 사람들의 손을 물 안에서 잡는 느낌도 그렇고 수업이 끝난 뒤에 목적이 어딘지 모를 파이팅을 외치는 일도 그러했다. "일상을 행복한 시선으로 보시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기에 목 언저리를 긁적거리다가 "매번 그렇진 않고요. 요즘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 친구에게 기분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하루를 부지런히 기웃거리며 지내요. 오늘 밤에 통화할 때는 무슨 얘기를 해야 이 친구가 지친 하루 끝에 웃으면서 잠들 수 있을까, 하면서요. 그러다 보니 누가 행복을 물어도 망설임없이 설명할 수 있나 봐요. 이번 여름의 행복은 아마 다 그 사람 덕분일 거예요." 미소를 지은 그녀는 손님용 노트를 꺼내왔다. 방명록처럼 여러 사람이 책에서 좋았던 구절이나 메모를 남기는 것이었다. 어느 손님이 남긴 메모를 보고 기분이 좋았는데, 내 얘기와 비슷해서 보여주고 싶다며 한 페이지를 펼쳐 줬다. 누군가 이렇게 적어두었다. ‘비가 온다. 네게 말할 게 생겨서 기뻐. 비가 온다구!’
그 날의 대화를 생각하며 걷다 보니 집에 도착했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같은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을 거다. 그런데 그때 내가 알고 있던 기쁨이 뭐였더라. 오늘의 사소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들려줄 때의 행복은 또 뭐였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도무지 감정을 알 수 없는 이 어리둥절한 상태는 바쁜 일 덕분일까, 사랑이 없어서일까. 그 모든 이유 때문이라면 언젠가 다시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고양이 밥그릇에 간식을 수북하게 담아주고 욕실로 들어갔다. 땀에 젖은 옷을 허물처럼 벗어 던지고 시원한 물에 샤워를 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다가 “아, 행복해.”라고 소리 내어 말해버렸다. 앞에서는 고양이가 그런 내 모습을 멀뚱히 봐주고 있었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팔베개를 베고 가만히 누워 밤을 지새우면서 빗소리를 듣던, 젊은 나날의 조각들.”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중에서
사월의 미, 칠월의 솔김연수 저 | 문학동네
우리는 서로를, 타인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고 함께 걸을 수는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어깨에 몸을 기대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을 기대는 일이다.
산문집 『20킬로그램의 삶』과 서간집 『어떤 이름에게』를 만들었다. 회사에서 비주얼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김연수> 저13,500원(10% + 5%)
이 모든 삶들이 진짜야. 기억해요, 그날의 햇빛과 그날의 바람과 구름, 젖은 나뭇잎의 냄새까지도…… 함석지붕 집이었는데 빗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우리가 살림을 차린 4월에는 미 정도였는데, 점점 높아지더니 7월이 되니까 솔 정도까지 올라가더라. (……) 혹시 날이 밝으면 이 사람이 감쪽같이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