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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태도

꽃을 밟지 않으려 뒷걸음 치던 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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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을 ‘어떤 태도’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는 노력이 관계를 지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2018. 08. 07)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주선자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소개팅이었다. 당사자들 역시 느긋했다. 그는 지방 도시에서 일했다. 주말마다 서울에 왔다. 나는 일이 없는 날이면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주말은 평일의 과로를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날짜를 잡기 어려웠다. 가끔 메시지가 오갔다.

 

시간을 끄는 사이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일명 ‘럭키박스’를 제안한 쪽은 나였다. 우편으로 서로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을 보내자고 했다. 독서 안목과 취향을 확인하고 싶었다. 출신 학교, 나이, 사는 곳, 직업 따위는 내게 어떤 사람에 대한 주요 ‘정보’가 되지 못했다. 한 사람의 독서 목록이야말로 그 사람에 대한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책 선물은 무척 까다롭다. 내게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 선물로 보낼 책 리스트 안에 일정 부분 담기게 되리라 여겼다. 물론 그 말을 입 밖에 꺼내진 않았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재밌는 제안이라며 흔쾌히 응했다. “이미 갖고 계신 책을 잘 피해서 보내드려야 할 텐데요.” “이미 갖고 있거나 읽은 책이라면 또 그런대로 재미가 있을 것 같네요. 각자 취향대로 골라요.” 우리는 얼굴을 마주하기 전 서로가 보낸 책으로 먼저 만났다. 2013년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그가 보낸 상자 안에는 세 권의 책이 들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봄날의책), 『평등해야 건강하다』 (후마니타스), 『연필 깎기의 정석』 (프로파간다). 이미 갖고 있던 책이 한 권 있었지만, 고심의 흔적이 엿보이는 나쁘지 않은 구성이었다. 나는  『사당동 더하기 25』 (또하나의문화), 『염소의 맛』 (미메시스),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 (봄날의책), 『다정한 호칭』 (문학동네)을 보내둔 터였다.

 

서로에게 감사를 표하고, 새해 인사를 주고받았다.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러려니, 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피곤한 일이다. 기자로 일하면서 오랜 친구들과 소원해졌다. 마지막 애인은 내게 “너는 내가 없어도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심심하고 평화로운 이별이었다. 취재원은 일이 끝나면 적당히 흘려보내야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물며 소개팅 상대라니. 생각만으로도 하품이 났다. 나는 그를 잊었다.

 

다시 연락이 온 건 4개월 뒤였다. 연극 티켓이 생겼다고 했다. 한유주의 소설집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문학과지성사)에 실린 단편 ‘자연사 박물관'을 낭독 연극으로 만든 작품이었다. 만사가 귀찮아서 만나자는 말을 듣고도 시큰둥했던 나는 관련 메시지가 오가는 동안 자세를 조금 고쳐 앉았고, 저녁에는 책을 사서 집에 돌아왔다. 만남에 대한 기대보다는 몰랐던 책을 새로 알게 된 기쁨과 함께였다.

 

“나는 언젠가부터 타인의 죽음으로 나이를 세기 시작했는데, 그래, 나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죽지 않았고, 죽지 않았으므로 입도 살아 있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산 입에 거미줄을 치지 않으려고, 혹은 입에 풀칠하려고, 죽은 사람들의 죽음을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산 사람들을 죽음을 예감하는 것이, 살아 있는 나에게 주어진, 온전한, 의무라고 생각했는데.”(『자연사 박물관』, 83쪽)

 

책을 펴자마자 쏟아진 문장 앞에 나는 얼굴을 묻고 울었다. 우리 모두는 당시 4월 16일을 통과하고 있었다. 단편은 2010년 발표된 작품으로 세월호 참사와 관련이 없었지만, 나는 저 문장 앞에서 세월호 이외에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즈음 나는 꿈속에서 자주 바다를 보곤 했다. 물속에 가라앉아 배의 철판을 뜯어내려고 애쓰던 어느 밤에는 엄마가 깨우고서야 꿈인 줄 알았다. 눈을 뜨고도 손끝이 한참 아렸다. 나흘 뒤인 4월20일, 우리는 연극이 끝나고서야 제대로 처음 마주 앉았다. 세월호 이야기를 하염없이 나눴다. 그 수치스러운 봄을 함께 견디고, 또 한 해를 견디며 앞으로의 수많은 밤을 약속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청혼은 내 쪽이 먼저였다. 카페에서 레고 블록을 맞추고 있던 그에게 “결혼하자”라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충동’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는 승낙의 대답 대신 “잘 생각해”라고 답했다. 그 대답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답이었다. 나는 결혼을 인생의 목적이나 목표로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비혼이야말로 나를 지키며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일정 부분 여전히 그렇게 믿는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지금’ 같이 놀고 싶은 친구를 만났고, 같이 놀면 재밌는 사람을 만났으니 함께 살고 싶다고 생각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혼을 대단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 해보고 아니면 그만둘 수 있는 인생의 ‘과정’으로 생각했다. 되도록 실패하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이 관계의 결말이 좋지 않더라도 그 실패가 내 인생을 흔들도록 두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느끼는 감정이 똑같지 않다는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가치관 우선순위를 체크하는 테스트를 했을 때 우리는 둘 다 최우선 순위로 ‘나’를 꼽았다. 그런 커플은 우리뿐이었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누군가를 돌보고 아낀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나는 우리의 건강함이 마음에 들었다. 며칠에 걸쳐 정말 ‘잘’ 생각한 끝에 나는 그에게도 청혼을 요구했다.  『행복한 질문』  이라는 그림책을 나에게 선물해. 청혼 대신 받아줄게.”

 

『행복한 질문』  의 주인공은 개 부부다. 아내 개의 질문은 엉뚱하고 사소하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 “있잖아, 만약에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내가 시커먼 곰으로 변한 거야.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할 거야?” 남편 개는 타박하거나 당황하거나 머뭇거리는 대신 이렇게 답한다. “그야 깜짝 놀라겠지. 그리고 애원하지 않을까? ‘나를 잡아먹지 말아줘.’ 그런 다음 아침밥으로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볼 것 같아. 당연히 꿀이 좋겠지?”

 

나는 사랑을 ‘어떤 태도’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는 노력이 관계를 지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어떤 맹세보다 중요한 사랑의 태도가 짧은 그림책 안에 깊고 빼곡하다. 책장을 열면 아무런 글자 없이 개 부부가 길가의 꽃을 밟지 않으려고 애쓰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온라인상에서 주로 쓰는 이름은 ‘둥글게’이다. 많은 사람이 동요 제목으로 착각하지만, 이상은의 노래 제목이다. “꽃을 밟지 않으려 / 뒷걸음을 치던 너와 / 부딪쳤어 / 함께 웃음이 나왔어 / 하늘이 투명해서 / 너도 빛났지”라는 가사를 처음 접했던 날,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내 그 가사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내 맞은편에 바로 그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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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장일호(시사IN 기자)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자주 ‘이상한 수치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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