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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저녁을 산책을 허밍을

박시하 『우리의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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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대로 하루의 끝을 침묵으로 마무리하려던 나의 기쁨과 슬픔을 헤아려본다. (2018. 08. 03)

 

출처_언스플래시.JPG

           언스플래쉬

 

 

뜻대로 단출한 하루를 보냈다.


가끔은 빈틈 많은 생활이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 대량 세탁이 가능한 기계 말고 조물조물 손을 써야 하는 빨래나 밥과 물과 김치만으로 차려진 밥상, 바닥에 누워 늘어지게 자는 낮잠이 아니라 볕이 드는 책상에 엎드려 잠시 눈을 붙이는 쪽잠이 더 온전하게 느껴지는 건 다 부족함 때문이다. 생활을 알뜰하게 하는 사람은 늘 부지런하고 애쓰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때론 나태하고 더러 힘쓰지 않고 살려는 사람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자는 것이 실용적인 소모라고 우리는 자주 착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육상화를 신고 파워-워킹 하며 열량을 떠올리기보다 슬리퍼를 끌고 슬렁슬렁 동네를 한 바퀴 돌며 뱃살을 쓰다듬는 저녁 산책은 얼마나 ‘소모적이지’ 못한 일인가. 그러나 그런 행위를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고 자신하는 사람의 여백은 본받을 만한 것이다.

 

저녁이면 혼자가 되어 산책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런 사람은 ‘매사 과하게 사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그런 소리는 꼭 혼자서 듣게 된다. 홀로된다는 것은 참으로 오묘해서 지금껏 누구와도 대화해보지 않은 ‘나’를 불쑥 내 앞에 꺼내놓게 된다. 그때 나와 마주한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니기도 하다. 잘 먹고 잘살아야지 애쓰며 나로 사는 동안 나도 모르게 복잡하고 무거운 내가 된 건 아닌지, 과식과 과음으로 점철된 생활을 되돌려보는 나는 그전의 나보다 조금 더 가벼워진 나이다.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일은 무게를 더하는 일처럼 보이나 오히려 무게를 더는 일이다. 진리는 무겁지 않고 가볍다. 떠오르고 흔들리고 날아간다. 산책 중에 과하게 기쁨이 넘친 하루와 과하게 슬픔이 넘친 하루를 조율하며 체지방을 소모하는 대신 생각의 과부하를 조절하는 이에게서 들려오는 느린 콧소리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생기롭다.

 

캄캄한 밤의 공원에서/ 유서를 썼다// 기분이 좋았다/ 맹꽁이가 커다랗게 울고 있었다/ 두 남자가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셔틀콕이 어둠 속을// 밤의 흰 새처럼/ 잊어버린 새의 이름처럼 날아갔다// 아이들이 텅 빈 미끄럼틀을 타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편지를 보낸/ 나 없는 세계에서 왔다/ 나는 유서를 밤의 공원에/ 벤치 아래의 어둠 속에 묻었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내가 어딘가로 떠났고/ 이 세계로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긴 한숨 소리가 번져 나갔고/ 나는 유서를 어디 묻었는지 잊어버렸다/ 그 밤의 공원도 잊었다/ 나를 잊었다// 새의 이름을 잊듯이
-박시하, 『우리의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  중 「밤의 공원에서」 전문

 

생기가 넘칠 때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산책자의 얼굴을 종종 목격한다. 혼자가 될 때만 나타나는, 내가 자주 마주하지 못하는 ‘나’가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빛 속에서 어둡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사람을 동경하곤 했다. 산다는 것 대신에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는 하루 저녁은 단출한 것일까, 어지러운 것일까. 생의 기운이 넘쳐 언제나 발랄한 사람은 어쩌면 생각보다 더 어둡고 복잡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한순간 죽음을 숙고할 수 있는 사람, 죽음에 신호를 보내고, 죽음에 인사할 수 있는 사람이, 그런 사람의 저녁, 산책이 어쩌면 더 정확하게 생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닐지.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 마음속으로 유서를 쓰고 그 유서를 마음속 깊은 벤치 아래 꼭꼭 묻어두었다가 다시 삶으로 돌아와 그 모든 것을 잊는 일. 그런 것을 흔들리는 콧소리로 흥얼거릴 줄 아는 이의 하루는 셔틀콕처럼 가볍다. 더 멀리 날아간다. 무너짐의 깊이를 단 한 번도 가늠해보지 않는 떠들썩한 사람과 가끔 생각의 줄자를 마음 안에 넣어 재보는 조용한 이 중에 더 자주 걷는 자는 누구일까.


뜻대로 하루의 끝을 침묵으로 마무리하려던 나의 기쁨과 슬픔을 헤아려본다. 나는 여름 저녁의 산책과 허밍을 좋아하는 사람. 허밍은 가까이에서 터져 나오는 노래가 아니라 멀리서 흘러오는 노래다. 말의 빈틈에서 완성되는 노래의 언어다. 산책은 어떤가. 산책은 걸을수록 여백이 많아지는 일이다. 내가 이 세계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런 생각은 얼마나 정확하게 소모적인 것인지. 나도 자주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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