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이병률, 어떻게 혼자일 수 있겠니
나를 기다리는 건 선택이었다
의식하지 않는 동안에도 우리는 선택한다
현실에서 캐낼 수 있는 어떤 것들은 조각조각만으로 힘이 된다. 일상 속에서 마음가짐 하나로 조작될 수 있는 선택지까지도 우리가 살아가는 데 힘의 재료로 쓰인다. (2018. 07. 03)
미용실에 앉아 있다. 머리를 잘라주던 여성이 머리카락의 잘라진 상태를 확인하느라 빗질을 하면서 묻는다. “이쪽이시죠?” 머리를 빗을 때의 평소 방향을 저렇게 묻기도 하는구나. 그 미용실에 세 번을 더 갔는데 그때마다 그녀가 묻는다. “이쪽이시죠?” 여러 번 나는 다른 쪽이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걸 참는다. 미용실에서 나와 차가 안 다니는 길의 신호등을 무시하고 그냥 건너려다가도 참는다.
평소 존경하는 신부님과 구례 화엄사엘 갔다. 예상하지 못한 밝음이 넘치는 화사한 봄날이었다. 그곳에서 여러 스님들과 함께 차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종교적으로 무엇도 따르지 않는 입장임에도 모든 것들이 넘치는 과분한 시간이어서 그랬을까. 벚꽃 아래로 난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나는 나에게 가만히 물었다. “이쪽인가요? …어느 쪽입니까?”
선택해야 할 순간에, 막상 선택보다는 망설이는 시간들이 쌓이고 쌓이는 것이 사는 일의 속성이겠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망설이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무조건 선택하고 나서 후회할 때 후회하더라도 왠지 그것이 살면서 뭔가 밀고 나가는 기분이 들어서라고 해야 할까.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뭘 먹어야 할지 특별한 것을 먹어야 할지를 망설여야 하는 시점 앞에서 나는 어떻게든 정하는 일을 먼저 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뭐든 저지르고 마는 유형의 사람이 되겠다고 입장을 정했다 해서 나쁜 일만 하겠다는 건 아니니까.
이 길을 가야 하나, 저 길을 가야 하나. 이 길을 가면 금방 갈 거 같은데 이 길은 자신이 없다. 저 길을 가면 멀리 돌아서 가는 기분이 들지만 숙명처럼 그 지도를 따라야 할 때도 있다. 얼마 전 새 사무실에 손님들을 초대해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근처 식당을 가기에도 그렇고, 그렇다고 직접 요리를 하자니 사람 수가 많아 음식을 주문하기로 했다. 한 요리사가 제시한 두 가지의 메뉴 앞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그런데 살짝 고민인 것이 나로선 그런 맞춤형 음식을 준비하는 자리가 처음이고, 나 혼자만 먹는 것이 아닌데다, 더군다나 그날의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도통 예상할 길이 없음인 거다. 이럴 땐 “알아서 해주세요.”가 정답인 것이 그 자리가 성공적이어야 얼마나 성공적이고 안 좋아봤자 얼마나 안 좋을까 하는 데 있는 것.
그냥저냥 만나는 사이도 있는데 한 사람만 감정의 비중이 과하다면 그 관계는 재미없는 쪽으로 흐른다. 그 사람은 꼼짝도 않는데 나만 열을 내고 화를 내면 내가 괴물이 된다. 그 사람은 나에게 1도 관심이 없는데 내가 그 사람을 1000을 사랑할 때도 나는 괴물이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반대 방향으로 나를 잡아끌어낼 수 있겠는가. 나는 오래전부터 쓰는 로션이 있는데 누군가 최고라며 다른 로션을 선물한다. 나는 집에서 자는 것보다는 바깥에서 자는 걸 좋아하는데 이제는 그러지 말고 집에 정이 가게끔 하는 요소를 들이란다. 그렇다고 그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의식하지 않는 동안에도 우리는 선택한다. 둘 중의 하나. 선택을 하면서도 그것이 자연스럽다는 사실조차 의식 못하는 상태에 놓인다. 그전에도 그랬을까. 200년 전에 태어났더라도 이토록 선택해야 할 일들이 즐비했을까. 자잘한 것이든 커다란 것이든 선택은 행복에 관여한다. 행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하는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택은 ‘싸움’의 다른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둘 중의 하나. 혼자가 좋을까, 둘이서가 좋을까.
함께가 아닌 혼자 바에 가고, 혼자 극장에 가는 것. 혼자 여행을 하고 혼자의 시간을 독차지하는 것. 그 선택은 무엇으로 떠밀려서 하는 행동이 아니며 고통스러운 잠행도 아니다. 그렇게 혼자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순간에도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고 싶어지고, 그 작은 마주침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아주 잠깐 괜찮은 상태에 놓이는 것 역시도 예견된 선택일 테니.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인가, 아닌가. 누구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인가, 아닌가. 외로움을 견디는 사람인가, 외로우면 누굴 찾고 마는 사람인가. 뭘 잘 두는 사람인가, 뭘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늘 헤매는 사람인가. 닭발 같은 것을 먹을 때 비닐장갑을 왼손에 끼는 사람인가, 오른손에 끼는 사람인가.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하고 다녀도 괜찮은 사람인가, 금방이라도 죽을 듯 분해서 못 참는 사람인가. 얼굴에 나타나는 사람인가, 얼굴 안쪽에 숨기는 사람인가. 하지만 우린 어떤 식으로든 알게 되었다. 선택의 무수한 과정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된 ‘나’라는 사람을. 별 거 아닌 그렇고 그런 취향을 가진 ‘나’라는 사람을.
사랑이 그랬다.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사랑만 있는 줄 알았다. 사랑이란 건 히말라야만큼 크니까. 사랑이 나를 활활 살게 하니까. 사랑이 끝나고서야 사랑이 아닌 다른 게 있는 걸 알았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죽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푸드덕푸드덕 살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조각조각까지도 선택한다. 그때는 그랬을 리 없을 상황들을 이제는 꺼내보며 내가 원하는 상황으로 재배치한다. 나의 관점, 나의 고집으로 인해 별로 좋게 기억될 만한 사건이 아닌데도 시간이라는 망사를 통해 그때 일을 통과시켜 재편한다. 그렇게까지 안 좋은 기억일 리가 없다고 퉁치면서까지. 내가 편해지는 것이 되게끔 뭉쳐놓는 것, 그것도 기억이니까. 지나면 별 일 아닌 것이 된다. 지난 일들이 칙칙하고 아픈 일 투성이면 닥쳐올 날들도 칙칙하고 아픈 일 투성이일 거란 걸 모르지 않기에 알음알음 추억을 재배치하려는 것도 본능이 하는 일이다.
현실에서 캐낼 수 있는 어떤 것들은 조각조각만으로 힘이 된다. 일상 속에서 마음가짐 하나로 조작될 수 있는 선택지까지도 우리가 살아가는 데 힘의 재료로 쓰인다.
사랑할 때도 너의 등을 사랑하는 건 괜찮다. 너의 정면을 사랑하는 것보다 덜 눈부시고 덜 아프다. 비겁한 일이지만, 비겁하면 덜 아프다.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그날엔」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저서로는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찬란』 등과 여행산문집 『끌림』(2005) 등이 있으며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