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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줄 알았던) 산책

태몽은 쪽파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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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하다 보면 이전에는 시시하다고 여겼던 일들의 다른 얼굴을 발견할 때가 있다. 왜 이걸 지금 알았지, 하며 그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2018.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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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태몽이 뭐였어?” “꽃. 아주 예쁜 꽃. 우리 할머니가 절벽에서 분홍색 꽃을 봤는데 너무 예뻐서 꺾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뒀대. 꺾으면 나쁜 꿈이라고 하던데 안 꺾어서 다행이었지.” “앗? 나도 외할머니가 꿔주셨는데 내 태몽도 꽃이었어! 근데 좀 웃긴 게 쪽파꽃이었어. 외할머니가 쪽파 씨앗을 심었는데 거기서 꽃이 펴서 기뻐했다고 하더라고. 우리가 방금 본 건 대파꽃이었지? 쪽파꽃 본 적 있어?” “아니? 어떻게 생겼지?” “글쎄, 대파꽃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내 태몽이지만 한 번도 찾아본 적 없어서 나도 몰라.” 친구와 나는 속초의 어느 골목을 산책하고 있었다. 무너진 담 너머로 대파꽃 무리를 발견했고 한동안 멈춰서서 대파꽃을 구경했다. 다시 걷기 시작하자 괜히 내 태몽을 들려주고 싶어서 친구의 태몽을 먼저 물었다. 속셈이야 어찌 되었든 잘한 일이었다. 그녀도 나처럼 할머니의 꿈에서는 세상 어느 꽃보다 아름다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어릴 적 ‘쪽파꽃 태몽’을 검색해본 날이 있다. 수업 시간에 자신의 태몽을 발표했는데 40여 명의 친구 중 쪽파꽃을 말한 사람은 없었다. 누구는 용이고, 호랑이고, 파랑새였는데 나는 파였다. 대파도 아니고 쪽파. 친구들이 “쪽파가 뭐냐 쪽팔리게!”라고 놀렸다. ‘태몽 따위 없다고 할 걸 괜히 말했어.’ 생각하며 집에 와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검색해보니 드물게 쪽파나 쪽파꽃이 태몽이란 사람들이 있었다. 묘한 안도를 느꼈지만 정작 그 ‘꽃’이라는 게 어떻게 생겼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나만 이런 시시한 태몽을 가진 게 아니란 사실을 확인했으니 곧바로 모니터를 꺼버렸다.


친구와 나는 다시 걸었다. 속초 바다와 낮은 담을 옆에 두고 걷는 내내 쪽파꽃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휴대전화로 ‘쪽파’를 검색해봤다. 백과사전을 확인하다가 몰랐던 사실을 몇 알게 되었다. 쪽파는 씨앗에서 자라는 채소가 아니고 마늘처럼 생긴 씨쪽파를 심으면 거기서 자란다고 한다. 대파나 부추 같은 것들을 모든 포기가 꽃을 피우는데, 쪽파는 전체 중 극히 일부만 꽃을 틔운다. 블로그를 검색해보니 어떤 사람이 쪽파 무리에 꽃이 핀 것을 발견하고 ‘대낮에 발견한 반딧불이 같았다’라고 써두었다. 그가 올려준 사진 덕분에 처음으로 쪽파꽃을 보았다. 엄마에게 태몽을 물었을 때, 왜 엄마는 쪽파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주지 않았던 걸까. 쪽파꽃은 꽤, 아니 몹시 귀여웠다. 어릴 적에 봤어도 귀엽다고 생각했을까. 잘 모르겠다. 아무튼, 뒤늦게 외할머니의 시시한 꿈이 좋아졌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모양은 아니겠지만, 산책하다가 우연히 이 꽃을 발견한 누군가나 씨쪽파를 심어본 이에게는 커다란 기쁨이 될 수도 있을, 쪽파꽃.


쪽파꽃 태몽을 창피하게 여기던 즈음에는 엄마나 할머니가 왜 자연을 두고 감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산이나 들을 산책하다가 쭈그리고 앉아 낮은 꽃들을 들여다보며 “좋다”고 말하는 어른들은 재미없었다. 그들은 거기에 두고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랬던 내가 엄마나 그녀의 엄마가 보여주었던 모양새로 쭈그리고 앉아 말 없는 것들을 본다. 그냥 보는 거로는 부족한지 혼잣말로 “좋다”고 되새김질을 하면서. 사소한 일이라는 게 있긴 한 걸까. 한 사람 안에서 사소했던 일이 점차 거대해지고, 한때는 거대하다 여긴 일들이 한없이 사소해지기도 하는 시간을 매일, 성실하게 걸어가고 있다. 이전에는 몰랐던 작은 꽃을 보며 감동하는 마음이 아줌마나 할머니가 되어가는 일에 포함되는 거라면, 어디 한 번 기꺼이 늙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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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산책을 하면서 산발치에 있는 우리가 사는 도시를 내려다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산책을 하는 것도 얼마간 기쁜 일이다. 어릴 때 같았으면 산책 같은 걸 할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내아이는 산책이란 걸 하지 않는다. 사내아이가 산속으로 들어갈 때는 도둑이나 기사, 혹은 인디언이 되어 들어간다. 강으로 갈 때면 뗏목꾼이나 어부 혹은 방앗간 짓는 목수가 되어 가는 것이며 초원을 누빌땐 영락없이 나비나 도마뱀을 잡기 위해서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산책이란 것이 어른들이 하는 품위는 있지만 어딘가 지루한 일로 여겨졌다.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일 같았던 것이다.


손에 들려 있던 파란 메꽃은 금세 시들어버렸고 나는 그것을 풀밭쪽으로 멀리 던졌다. 회양목 가지를 꺾어 조금 갉아먹어 보았다. 그것은 향이 강한 양념처럼 썼지만 조금은 고소한 맛이 났다. 키 큰 금작화가 서 있는 제방 둑 근처를 걸을 때 초록색 도마뱀 한 마리가 발 밑으로 잽싸게 지나갔다. 그러자 소년 시절 장난기가 다시 내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재빨리 달려가 몸을 숨기고 도마뱀을 찾아 기웃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 작은 동물을 태양처럼 따스하게 내 손에 잡아 쥘 수 있었다. 작은 보석같이 반짝거리는 도마뱀의 눈을 들여다보자 어린 시절 사냥하며 느꼈던 기쁨이 되살아났다. 그 유연하고 힘센 몸통과 단단한 다리들이 내 손가락 사이에서 완강하게 버티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도 이내 흥미가 없어졌다. 이제부터 이 동물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리저리 가지고 놀아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고 되살아났던 기쁨도 금세 사라져버렸다. 몸을 굽혀 손을 벌리자 옆구리가 들썩거릴 만큼 거칠게 숨을 몰아 쉬던 도마뱀은 어리둥절한 듯 잠시 동안 꼼짝 없이 앉아 있다가 황급히 풀숲으로 달아났다. 그때 반짝이는 철로 위로 기차 한 대가 달려왔고 이내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그 기차를 바라보며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이제 이곳에서 확실한 기쁨을 느낄 수 없음을. 저 기차를 타고 다시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 헤르만 헤세 『정원일의 즐거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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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박선아(비주얼 에디터)

산문집 『20킬로그램의 삶』과 서간집 『어떤 이름에게』를 만들었다. 회사에서 비주얼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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